충분한 공급은 아직 먼 길이라는 지적도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심각한 주택 위기에 영미권 중심으로 확산
주택 공급을 늘려 집값과 월세 폭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임비(YIMBY, Yes In My Backyard)’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공공 임대주택 확대에 목소리를 키우던 영국과 미국의 좌파 정치인들도 이제는 공급을 가로막는 규제를 없애 집을 많이 짓자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좌·우 가리지 않고 초당파적 지지
‘내 집 주변에는 아무 것도 지어선 안 된다’는 것이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다. 자신이 속한 지역에 이익이 되지 않는 혐오 시설 등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취지가 강하다. 반면 ‘임비’는 어떤 형태의 주택이든 되도록 많이 지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최근 미국에서 집값 상승이나 노숙인 증가 등으로 인한 주택난 해결을 위한 주류 사회 운동으로 부상하고 있다. 2011년 한 수학 교사가 샌프란시스코의 고공 집값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지역 정부에 주택 개발 확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는데, 만성적인 주거 불안에 어려움을 겼던 젊은 세대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확산되었다.
임비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은 주택 부족이 누가·어디에·무엇을 지을 수 있는지를 통제하는 법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구역지정 및 계획법이 너무 엄격해 많은 지역에서 새로운 주택을 짓는 것이 불법이며,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주택 건설이 더디거나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지적한다.
경제학자들과 소수의 활동가들이 추구하던 임비 운동은 여러 국가에 수천 명의 회원과 지부를 둔 정치 운동으로 확대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 런던, 스웨덴 스톡홀름, 캐나다 토론토, 호주 시드니처럼 주로 집값이 비싸고 주택 공급이 더딘 지역들이 많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에서 주택 공급을 주장하는 단체만 140개가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 2016년 이후 생긴 신생 단체로, 미국 100대 대도시 가운데 45개 도시에 적어도 하나의 단체가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임비 운동 참가자의 면면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 가지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주거 비용이 많이 드는 대도시에 더 많은 주택을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전했다.
주목할 점은 임비 운동이 초당파적이라는 점이다. 우파부터 좌파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다. 좌파들이 임비에 적극적인 건 주택 개발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기존 인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고밀도로 개발해 주거용 건물의 층수를 높여야 같은 인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면적이 줄어 자연을 덜 훼손하고, 대중교통 시스템 확충도 쉽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톡홀름에서는 “밀집된 도시에선 장거리 통근이 줄어 자동차를 덜 타기 때문에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캘리포니아는 “다세대 주택보다 단독 주택이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좌파 성향 정치인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개빈 뉴섬 주지사(민주당)는 2019년 취임 이후 상업용 건물을 주거용 건물로 쉽게 개조할 수 있도록 했고, 좁은 부지에도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계단 설치 의무 개수를 줄이는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민주당 소속인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도 올해 초 시정연설에서 “사람들은 이곳에 살면서 이곳에서 일자리를 갖고 싶어한다”며 “앞으로 10년 간 80만 채의 신규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민주당이 임비에 적극적인 건 비싼 집값과 월세로 고통을 받는 젊은 세대와 무주택자가 주요 지지 기반이기 때문이다.
극심한 주택난에 시달리는 호주에서는 집권 여당인 중도 좌파 노동당이 지난 8월 5년 동안 120만 가구를 신규 공급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주택 건설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주정부에 인센티브를 주고 기존 대중교통과 가까워 입지가 좋은 지역에는 중·고밀도 주택 건설을 장려하기로 했다. 앨버니지 총리는 “공급 확대는 월세를 낮추고 세입자를 돕는 열쇠”라고 강조했다.
‘투기가 집값을 올린다’는 통념에 반박
임비가 초당파적 지지를 받게 된 건 선진국의 주택 위기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매된 주택의 평균 가격은 올해 3분기 51만 3,400달러로 20년 전의 두 배 이상이다. 같은 기간 영국의 평균 집값도 13만 3,000파운드에서 29만 1,000파운드로 올랐다. 뉴욕과 런던 같은 대도시로 한정하면 집값 상승률은 훨씬 높다.
월세 폭등도 어마어마하다. 무디스 애널리스틱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미국의 중위 소득 대비 월세 비율은 30.2%였다. 1,000달러를 벌면 300달러가 넘게 월세로 고스란히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무디스는 “소득의 30%를 월세로 지출하는 것이 대다수 미국 도시에서 ‘뉴 노멀’이 됐다”며 “임금 상승률이 주거비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주거 비용이 상승하면 지역 경제도 연쇄 타격을 입는다. 대출 이자를 갚거나 월세를 내는 지출로 인해 소비를 줄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연구단체 스마트번영연구소의 마이크 모팻 연구원은 CBC 방송에서 “주민들이 동네 식당·상점에서 쓰는 돈을 줄이면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고, 월세가 오르면 기업들이 직원을 붙잡기 위해 임금을 더 올려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아예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도 한다. 올해 초 캘리포니아공공정책연구소(PPIC)가 발표한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4%가 ‘주택비용 때문에 다른 주로 이사를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주택 공급을 늘리자고 말하는 이들은 ‘투기가 집값을 올린다’는 기존 통념에 적극적으로 반박한다. 미국 주택연구기관 사이트라인연구소의 창립자 앨런 더닝은 “투기는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에 이뤄지기 때문에 주택 공급은 오히려 이런 투기꾼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미국의 임비 단체 ‘임비 액션’은 “주택을 늘리면 더 많은 학생이 생겨 학교가 문을 닫는 일을 막을 수 있고, 동네 자영업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사람들은 자신이 자란 동네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임비 운동이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유로 고밀도 개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고층 아파트가 많은 동아시아와 달리 영미권은 단독주택이 많아 도시 밀도가 낮은 편이다. 특정 지역에 건설 가능한 주택 종류를 제한하는 구역 규제가 주택 공급을 가로막은 탓이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 호주 등은 주택 공급도 더디다. 짐 글리슨 런던광역당국(GLA)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0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인구 100명당 주택 수가 43채에서 44채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미국 역시 41채에서 42채로, 호주도 40채에서 41채로 증가량이 미미했다. 이에 임비 운동가들은 용도 상향을 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풀어 층수를 높이자고 주장한다.
공급이 늘어야 월세가 덜 오른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왔다. 비영리단체 ‘퓨자선기금’에 따르면 2017년 이후 미국 전역에서 주택은 3% 늘어나고 월세가 31% 올랐으나, 이 기간 다세대 주택을 짓도록 규제를 풀어 공급을 8~23% 늘린 미니애폴리스·뉴로셸·포틀랜드·타이슨스에선 월세가 1~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에서도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2016년 오클랜드는 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주거용 토지의 3/4을 용도 상향해 단독주택 구역은 줄이고, 최대 7층까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구역은 늘렸다. 그 결과 2016~2022년 사이 오클랜드 월세 상승률이 연평균 3%에 그친 반면에, 수도 웰링턴의 월세는 연평균 7%씩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