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 선생, 독립군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
남자현 선생, 독립군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
  • 김도윤 기자
  • 승인 2016.08.12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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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도윤 기자]

독립군의 어머니이자 우리들의 어머니

남성 못지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




1천2백만 관객을 끌어모았던 영화 <암살>. 이 영화에서 전지현이 맡았던 저격수 ‘안옥윤’의 실존 인물로 알려진 남자현 선생(1872년 12월 7일 ~ 1933년 8월 22일)은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알려진 인물이다. 웬만한 남성보다 대담한 성격과 추진력으로 조선 독립의 앞장선 그는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독립에 자신의 모든 걸 내건 그의 삶을 재조명했다.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선생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시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삼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남자현 선생은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해 7세 때부터 국문에 능통했고, 부친의 가르침으로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했다고 한다. 남 선생은 19살에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혼인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일본의 만행이 극심해지자 1896년 그의 남편 김영주는 진보면 홍구동 전투에 의병으로 자원했고, 그곳에서 영양의병장 김도현과 왜군에 맞서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얼마 뒤 남 선생은 아들 김성삼을 낳았다.
 

  홀몸으로 생계를 유지해오던 남 선생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그는 3월 9일, 아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랴오닝성 퉁화현으로 이주했고, 곧바로 김동삼 참모장으로 있는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곳에서 남 선생은 부상병 간호를 맡았는데, 그로 인해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었다.
 

  남 선생은 20~30년대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대원으로서 다양한 독립활동을 전개했다. 신앙인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북만주 일대의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했고,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만주지역 무장단체 통합에 이바지했으며, 이괄 등과 함께 조선혁명자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1925년, 남 선생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주살(誅殺)하기 위해 박청산, 이청수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독립군의 어머니’가 ‘여자 안중근’으로 알려지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1년, 만주사변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 리턴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했다. 이에 남 선생은 하얼빈에서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한국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냈지만, 이 역시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이춘기 등과 1933년에 3월 1일 만주국 건국행사 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만주국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 제거 계획을 세우고, 2월 29일에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거지로 변장한 채 하얼빈에서 장춘으로 떠났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 때문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심한 고문과 단식 투쟁 등으로 남 선생의 몸이 쇠약해지자 일본 경찰은 병보석으로 그를 풀어줬다. 석방된 지 며칠 되지 않은 1933년 8월 22일, 남 선생은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남대 사학과 송현강 교수는 “남자현 선생은 1920-30년대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여성 대원으로 늦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가담, 서로군정서에서 부상병 간호를 맡아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또 여자교육회와 교회 설립에도 앞장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해 무장운동과 계몽운동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남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드라마와도 같은 삶을 사셨던 것이죠”라고 이야기 전했다.

 

 

같은 독립운동, 하지만 다른 대우

임종 직전에 남자현 선생은 아들에게 중국 화폐 248원을 조선이 독립하게 되면 축하금으로 희사하라고 줬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마음)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조선 해방 이후 그의 유언대로 그의 재산은 김구에게 전달됐다. 남 선생의 업적은 1962년에 인정받아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최고인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올해로 광복한 지 70주년. 하지만 70주년이 되도록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하다. 남 선생에 대한 관심도 영화 암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우리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부족하다.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은 270명에 불과하다. 이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조선 독립을 목표로 남성 못지않게 헌신했다. 하지만 이념문제나, 공적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포상이 보류된 이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거나 그 존재 자체가 밝혀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더 많은 편이다.
 

  송 교수는 “먼저 학계에서 선행 연구된 바가 없습니다. 영화 <암살>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발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 분위기가 진작되고 있어 고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전수 조사와 그 결과를 토대로 제2, 제3의 남자현을 발굴·연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굴·연구를 촉구했다.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조선 독립’이란 삶의 이유이자 희망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혹은 남성 못지않게 투쟁으로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에 맞섰다. 그런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기보다는 이념이 어땠는지, 공로가 어떠하지는 따지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 독립’이라는 하나의 이상향을 위해 달려온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피땀을 되찾아주는 것이 후손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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