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사회적 편견 아래 한센인들의 슬픈 역사
한센인들, 국가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지난 6월 20일, 올해 개원 100주년을 맞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들의 단종(정관수술)·낙태 등의 피해 실상을 직접 듣는 특별 재판이 열렸다. 원심은 모두 한센인에 대한 정부의 배상을 일부 인정하는 판결을 냈지만, 정부가 불복하면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번 재판을 통해 한센인들이 가진 설움과 눈물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들의 인권유린에 관한 특별재판 열려
소록도에 위치한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지난 6월 20일에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유린과 관련된 특별재판이 열렸다.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 낙태와 정관 수술의 피해를 현장에서 직접 듣기 위해 사건 현장인 소록도를 찾은 것이다. 이날 법정에서는 한센인과 정부 측은 한센인에 대한 단종(정관수술)·낙태 수술에 강제성이 있었는지를 두고 공방을 벌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35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폭행과 감금은 물론 병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면허도 없는 의사로부터 단종 및 낙태수술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에 정부 측 증인으로 당시 소록도에서 일했던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이 출석해 “소록도는 당시 한센인의 아이를 키울 물적·제도적 여건이 전혀 안 됐다”며 “국가가 피해를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는 환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은 문제”라고 증언했다.
이날 진행되는 소송의 당사자인 A씨 등 139명은 지난해 7월 1심에서 “단종 피해자들에게 1인당 3,000만 원, 낙태 피해자들에게 1인당 4,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일부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정부가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며 재판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재판부는 7월 25일 재판을 열고 변론을 종결한다. 올해 개원 100주년을 맞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열린 특별재판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법원의 판결에 대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센인과 소록도, 설움과 차별의 역사
한센병은 1873년 노르웨이 의사인 한센이 발견한 병으로 흔히 ‘나병’ 혹은 ‘문둥병’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한센병은 한센간균(혹은 나균)이 피부나 신경계, 뼈, 근육, 안구 등을 침범해서 발생하게 되는데, 아직까지 전파경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은 장기간 환자들과 긴밀한 접촉을 한 사람들이 피부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데, 한센병에 걸리면 피부의 지각이 없어지고, 땀이 나지 않고 털이 빠지며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증상을 보인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24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연간 1만 명당 1건 미만으로 발생하는 드문 질환이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이 된 소록도는 일제강점기 때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이 격리되었던 공간이다. 1916년 조선 총독부가 지금의 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인 자혜의원을 세워 한센인 700여 명을 강제 수용시킨 이후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됐다. 한센인의 치료와 감염예방이 격리수용의 목적이었지만 총독부는 환자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강제로 단종·낙태수술을 단행했다. 한센인들은 이 곳에서 노역과 감금, 강제수술 등 오랜 아픔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정부는 한센인에 대한 격리수용정책을 이어갔다. 당시 소록도에 살던 한센인들은 1970~1980년대까지도 노동력 착취, 강제수술 등의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섬 바깥에 한센인 정착촌을 만들 때면 늘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설령 정착촌에 살 수 있게 되어도 한센인들은 목욕탕도, 식당도 갈 수 없었고, 버스도 타지 못했다고 전했다. 한센인 2세들에게는 ‘미감아(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딱지가 붙어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피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정부는 한센병이 전염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져 환자들을 소록도에 격리해서 관리했지만, 한센병은 1940년대에 이미 완치 가능한 질병으로 분류됐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센병은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 감염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이 임신을 한다고 해서 자녀들 또한 한센병이 걸릴 확률은 극히 낮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재 소록도에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9명으로 나머지 한센인은 모두 완치됐다. 발전된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한센병이 발생된다고 하더라도 초기에만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하다. 또한 치료를 받고 있거나 완치 후 후유증만 있는 사람은 전혀 전염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혀졌다. WHO 기준(인구 10만 명당 유병률 15명 이하)에 따라 한국은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 국가가 됐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1980년대까지 한센인에 대한 단종·낙태 수술이 자행됐다.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밝혀지자 정부는 2007년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진상규명위원회도 설치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낙태수술은 1980년대 후반까지, 정관수술은 1992년까지 행해졌다. 이에 한센인 500여명은 2011년부터 단종·낙태 정책을 펴온 국가를 상대로 5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정부의 항소로 판결이 지연되고 있어 정부의 항소 포기 및 일괄배상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한센인들의 천사, 마리안느
과거 한센인들이 겪었던 설움과 차별이 재조명되면서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 수녀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마리안느 수녀는 무려 43년간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지난 2005년 홀연히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195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병원 간호학과를 졸업한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가렛 수녀와 함께 1962년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 후 일흔이 넘는 나이까지 40여 년 동안 보수를 받지 않고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한센인들을 돌봤다. 그러나 그는 지난 2005년 11월, ‘소록도에 불편을 주기 싫어 떠난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자 더 이상 한센인들을 도울 수 없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떠나는 날까지 소록도의 한센인을 먼저 생각했던 마리엔느 수녀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대한민국 명예 국민이 됐다. 히딩크 전 감독 이후로 두 번째로 자랑스러운 명예 국민에 위촉됐다. 마리안느 수녀는 지난 4월 국립 소록도 병원 개원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 명예국민증과 함께 명예 국민 메달, 그리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십장생 자개 병풍’을 수여 받았다. 또한 문화재청은 한센인을 돌본 마리안느, 마거릿 수녀의 사택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최근 한국방문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마리안느 수녀는 고흥 군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고흥군에 따르면 마리안느 수녀는 최근 박병종 고흥 군수에게 A4지 1장 분량의 편지를 보내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사랑으로 포옹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와 한센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마리안느 수녀 선행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