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총선 대비 지지층 결집 차원이라는 분석도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여야 거대 정쟁 불씨로 급부상
작곡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추진과 홍범도 장군 등 공산당 활동 이력이 있는 독립운동가의 흉상 이전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격해지고 있다. 정부가 행동에 나서자 여야는 둘로 쪼개지며 ‘이념 논쟁’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
정부·여당은 광주광역시가 사업비 48억 원을 들여 추진 중인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사업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광주시는 지난 2020년 5월 동구 불로동의 정율성 생가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연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항일 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대한민국 국가보훈부 장관이 대한민국의 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막지 못한다면 국가보훈부 장관으로서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사업 철회에 장관직까지 걸겠다고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공법단체 역시 사업에 반대 의견을 공개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이회영 등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과 용산구 국방부·합동참모본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다른 장소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방부는 이들이 항일 운동을 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공산당 활동 경력이 있는 건 부적절하기에 흉상이 육사 내 생도 교육시설 ‘충무관’에 설치된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외부 이전을 결정했다.
흉상 이전과 관련된 논란은 해군 홍범도함 함명 변경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해군은 항명 변경을 검토하고 있진 않다고 전했지만, 군 수뇌부에 결정에 따라 이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 이 경우 흉상 이전보다 더 큰 파장이 예상된다. 이로 인해 윤석열 정부 두 번째 국방부 장관에 지명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의 장관 취임 후 행보도 주목되는 상황이다.
정치권도 ‘이념 논쟁’을 벌이며 둘로 나눠진 상태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정율성은 직접 중국군 일원으로 참여해 전선 위문 활동을 펼치고 중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 입장에선 영웅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선 6·25 참상에 일조한 인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강기정 광주시장은 “역사 정립이 끝난 정율성 선생에 대한 논쟁으로 더 이상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라”고 했다.
다만 국민의힘은 ‘홍범도 흉상 이전’과 이념 논쟁을 연결 짓는 건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이전 검토가 논의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과 관련 있을 뿐이지 홍 장군의 공적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독립군 흉상을 제거한다는 논란이 발생한 걸 보니 박근혜 정부 때 국정교과서 논란이 생각난다”며 “건국절 논란, 친일 논란, 국정교과서, 이제는 독립군 흉상 제거다. 윤석열 정권이 걱정된다.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하란 말을 상기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민주당을 탈당한 윤미향 무소속 의원이 최근 친북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주최하는 간토 대지진 100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것을 두고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자유민주주의 국체를 흔들고 파괴하려는 반국가행위에 대해 정치 진영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과 함께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집권 2년 차를 맞아 ‘이념’을 부쩍 강조하는 윤 대통령이 윤 의원을 염두에 둔 발언이란 해석이 나왔다.
연이어 ‘이념’ 강조하는 대통령
이처럼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이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를 대비하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이념의 방향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뜻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지난 8월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철학이 이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철 지난 엉터리 사기 이념에 매몰되는’ 경우를 언급하며, “어느 방향으로 우리가 갈 것인지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현재의 좌표가 어디인지 분명히 인식해야 우리가 제대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앞선 6월 자유총연맹 축사에서는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다”고 했고,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 국가세력이 활개 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념 논쟁으로 정치권이 분열된 상황에 대해 여야 내부에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국민의힘 소속 홍준표 대구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항일 독립전쟁의 영웅까지 공산주의 망령을 뒤집어씌워 퇴출시키려고 하는 것은 오버해도 너무 오버한다”며 “그렇게 하면 매카시즘으로 오해를 받는다”고 지적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도 “윤석열 정권의 이념과잉이 도를 넘고 있다”며 “친일매국에 대해선 지나치게 눈감고 종북좌익에 대해서는 일제시대 이력까지 끄집어 내 매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념 편향이고 이념 과잉”이라고 비판했다. 김병민 국민의힘 최고위원 역시 S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이뤄졌던 일들에 대한 약간의 조정 과정들을 국방부, 육사가 추진한 게 아닌가 싶은데 과유불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지도부 역시 민생 행보가 이념 논쟁에 묻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모양새다. 그렇다고 정부 기조를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일하는 국회’를 강조한 여당의 이념 공세 수위와 대상을 두고 고심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 국정 기조를 비판하며 이재명 대표가 무기한 단식·장외투쟁에 들어간 가운데, 민주당은 이념 편향으로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권칠승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 이력을 명분으로 내세우는데, 21세기에 독립운동을 하게 생겼다고 자조하는 여론들이 많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이) 자꾸 반공 이데올로기 역사 전쟁을 거는 것 같다”며 “박근혜 정부도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시도한 후 이를 기점으로 급격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고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9월 정기국회 시작 후 예산안 심사와 국정감사가 진행되면 총선 구도를 염두에 둔 여야 공방이 진행될 것이기에, 정부·여당 대 야당의 구도를 명확히 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전략으로 이념 논쟁을 꺼낸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하반기 국정 동력 확보를 위한 행보라는 해석도 있다. 여소야대 국회 상황 속에서 윤 대통령이 “지난 1년간 우리 국민들께서 변화와 개혁을 체감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고 자평했듯 집권 1년 차에 뚜렷한 변화와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던 만큼, 하반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위해 추진 동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라는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