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민단체 이끄는 3人
대한민국 시민단체 이끄는 3人
  • 안수정 기자
  • 승인 2011.12.22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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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이 행동할 때입니다”
[이슈메이커=안수정 기자]

[NGO & Star] 시민단체 스타

21세기에는 국가의 힘이 줄어들고 시민사회의 힘이 커질 것이라는 주장이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시민운동가 출신 첫 서울시장이 당선됐고, 국가의 굵직굵직한 현안에 시민단체가 목소리를 내는 등 이들의 역할은 날로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시민단체의 역할이 사회의 불협화음과 국민 개개인의 목소리를 취합하여 바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3인을 소개하고, 이들이 보는 시민단체와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 들어본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꽃 피운 ‘박원순’

▲박원순 서울시장(희망제작소 제공)
우리나라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을 소개하는데 있어 박원순 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이후 박원순)를 첫째로 뽑는데 이견이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가면 한국의 시민운동이 어떻게 변화·발전해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가로서 한국시민단체의 발전에 큰 획을 근 박원순의 삶을 분류한다면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설립, 희망제작소 창립으로 나뉜다. 먼저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부천 성고문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다. 하지만 선배인 조영래 변호사의 죽음을 계기로 유학을 떠난 뒤 돌아와선 시민운동가로 발을 옮겼다. 참여연대는 박원순이 일궈낸 중추적 시민단체다. 그가 인권 변호사가 되고, 시민운동에 적극 나선 이유는 시끄러운 것이 강요된 침묵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에서다.

이어 박원순은 2000년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했다. “커피를 어떻게 하면 싸게 사서 이익을 남길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제3세계 농부에게 어떻게 하면 커피 값을 제대로 지불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까 고민한다”는 말에서 그가 펼치고 있는 대안운동의 철학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2001년 설립한 아름다운 가게는 헌 물건을 기부 받아 수선을 해 팔아 그 이익을 사회에 반납하는 단체로 시민운동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2006년에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아시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늘 새로운 생각과 발상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스스로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칭하며 2006년 희망제작소를 창립한다. 희망제작소에서 상임이사를 맡아 지역사회 운동, 청년 벤처운동, 소기업 지원운동 등을 벌이며 공공정책을 연구했다. 예컨대 ‘희망수레 운동’을 통해 소기업을 발굴ㆍ육성하고 소비자들에게 홍보하는 일을 진행한다. ‘사회적 기업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고유의 상품 개발이 핵심’이라는 그의 정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는 희망제작소 등 속한 조직에서 ‘상임이사’라는 직함보다 ‘원순 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직 활동의 창의성을 높이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나이ㆍ직급 등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수식어인 ‘한국 시민운동의 대부’를 한사코 마다한다.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표현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정부와 기업의 리더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달리 시민사회는 공동체를 형성해 함께 일을 해나기 때문에 모든 활동가, 회원들이 다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뜻이자, 그가 발전시킨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잘해서 선배를 뛰어넘는 사회가 되어야 밝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새로운 리더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하는 박원순. “할 일이 많아서 행복하다”는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환경지킴이, 환경재단 ‘최열’

시민운동 1세대 출신 박원순과 쌍두마차로 거론되는 이가 있다. 바로 ‘환경아이콘’이라 불리는 환경재단 최열 대표다. 대학시절 박정희정권의 3선 개헌에 충격을 받고 학생운동에 나서 1975년 명동 가톨릭학생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안양교도소 수감 중 선·후배 학생 운동가들이 모두 노동운동을 지향할 때 그는 공해반대운동 투신을 결심했다. 1982년 국내 첫 민간 환경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30년간 환경운동가의 길만 걸었다. 1995년 환경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골드만 환경상’을 받아 상금 7만5000달러 전액을 환경센터 건립기금으로 내기도 했다. ‘시민운동은 시대에 앞서가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라는 신조를 가진 그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환경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를 주도해왔다. 최 대표는 21세기는 환경 문제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 돼야 할 시급한 문제임을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2002년 설립한 환경재단은 21세기 환경과 생명을 지킨다는 기조 하에 환경 경영활동 지원 및 국내·외 시민·환경단체를 위한 장학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환경을 문화에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환경에 대한 국민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최 대표는 “환경재단은 환경과 사회를 잇는 희망의 가교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요. 이를 위해 문화적인 접근방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환경문제를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도록 돕는 아시아 환경 네트워크의 중심입니다”라고 재단을 설명했다.

더불어 NGO 영역을 국제사회로 넓히고 있는 최 대표는 “저희의 활동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까닭은 지난 20년간 활동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와 기대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라며 “앞으로 열심히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NGO 활동의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권면했다. 최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고건, 오세훈, 문국현, 박원순 등과 한때 모임을 같이 하며 ‘뜻’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현재 그만 빼고 모두 정치와 인연을 맺고 있다.

 

희망의 온기 전하는 한국월드비전 ‘박종삼’

▲한국월드비전 박종삼 회장(월드비전 제공)

정부의 손길이 못 미치는 구석을 비추는 빛으로 역할은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구호 단체로 월드비전을 꼽을 수 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한국 거리에는 굶고 병든 아이들이 넘쳤다. 전쟁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커다란 트럭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아이들의 시체를 보고, ‘어린 생명을 돕자’는 구호단체가 생겨나게 된다. ‘한국 월드비전 60년, 세계 월드비전 60년’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월드비전 박종삼 회장은 1950년의 추운 겨울을 ‘거리의 소년’으로 지냈다. 연약한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진료 봉사에 나섰고, 무의탁 청소년들을 위한 마을을 세웠다. 20년 넘게 교수로도 봉직하며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을 뒤로하고, 학교 정년 퇴임식 날 비로소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한 그의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간 쌓은 지식과 네트워크를 월드비전의 성장을 위해 쏟아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2003년 그가 회장 자리에 오른 후 월드비전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8년 새 후원자는 39만 명을 넘어섰고, 후원금의 규모도 1,000억 원 대로 증가했다. 아동 결연사업의 규모는 미국·캐나다·호주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성장했다. 박 회장은 이 결과를 두고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60년간 결연사업을 해온 숱한 국가를 제치고, 해외 원조 2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이 4번째로 결연 아동이 많다는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얘기할 수가 없어요”라며 벅찬 감정을 드러냈다. 박 회장은 우리의 나눔을 일컬어 ‘개미군단의 승리이자, 생명 나눔’이라 칭한다. 선진국처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거치며 부를 축적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를 돕는 건 말 그대로 자선이지만, 식민시대와 전쟁, 가난과 독재를 거치며 살아온 우리의 나눔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덧붙여 국가나 대기업의 나눔도 소중하지만, 십시일반 자기 것을 나누는 우리나라 국민이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 해외에 나가면 다른 나라 NGO들이 다가와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코리아 넘버원’이라고 말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박 회장은 “많은 나라들이 제 눈치를 보며 지원을 해줄 수 있냐고 묻죠. 그럼 저는 ‘당당하게 요청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난했던 시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당신들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죠. 잿더미 속에서 일어난 우리를 보면서, 그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습니다”라고 우리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덧붙였다. 국민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가장 가난하고 급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 1년에 필요한 돈이 230억 달러(26조원)입니다. 어마어마한 돈으로 들리지요? 하지만 전 세계 나라들이 국방비로 쓰는 돈이 1년 7,800억 달러(881조원), 마약으로 쓰는 돈이 4,000억 달러(450조원), 향수로 쓰는 돈이 120억 달러(13조5000억 원)입니다. 돈이 없어서 돕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배의 문제, 마음의 문제입니다”라며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월드비전한국의 2020년 목표는 전 세계 100만 명의 아이들을 돕는 것. 비극을 성공으로 만든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 목표도 꼭 달성하게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며 목소리를 높인 박종삼 회장. 지난 2003년부터 한국월드비전을 이끌어 왔던 그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월드비전을 떠난다. 비록 회장직에서는 은퇴하지만 교회 사회봉사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그의 나눔 활동은 평생 이어질 계획이다.

 

전문성을 지닌 차세대 지도자 절실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현주소인 이들이 단체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세 명 모두 ‘전문성’이라는 단어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박원순 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악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다. 그 속에서 합의를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각의 목소리에서 합의를 찾아 한 목소리로 큰 울림을 전하는데 보다 전문성을 갖춘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환경재단 최열 대표도 시대를 앞서가는 시민단체가 되기 위해서 규모가 큰 단체와 작은 단체 각각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전문성을 가지고 원칙하에 연대해 나가야 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원칙과 전문성 없이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시민운동이 전개되면 국민의 호응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월드비전의 박종삼 회장의 뜻도 다르지 않다. 그는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현장을 찾아내고, 가장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해결책을 마련하고, 후원자들을 설득해야 하는 일을 위해서는 스스로 ‘실력’을 키워야 함을 부연했다. 더불어 3인 모두 시민단체는 수장 한명의 힘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회원의 목소리와 뜻이 취합되는 공동체임을 강조하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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