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미국 어바인시 최석호 시장
[단독]미국 어바인시 최석호 시장
  • 이슈메이커
  • 승인 2013.01.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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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이슈메이커]

 



교육과 치안의 도시 어바인의 우뚝 솟은 한국인

“조국과 한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국의 위상 알릴 터”
 

 

 

 
지난 11월 6일 전 세계의 관심이 미국으로 쏠렸다.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인가 롬니 공화당 후보의 당선인가에 매스컴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을 때 한국 국민들의 관심은 또 하나의 선거에 눈을 떼지 못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오렌지카운티 어바인시에는 한국인의 소중한 역사를 세긴 인물이 있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래리 애그런 후보를 2천 500여표 차로 당당히 물리치고 공화당의 최석호 시장이 당선됐다. 타국에서 한국인의 뚝심을 보여주고 있는 그와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의 메일이 미국으로 날아갔다.

 



한인 시장의 연속 당선, 한인사회의 빛이 되다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어바인시의 시장선거는 최석호 후보(당시)가 래리 애그랜을 물리치면서 연이은 한인시장 탄생을 알렸다. 이번 선거는 최 당선자와 함께 크리스티나 셰 후보(공화당)가 당선되면서 12년 동안 시의회를 주도해왔던 민주당이 허물어지고 공화당이 다수파를 차지하게 된 의미도 큰 선거다. 미국에서 터를 잡고 시장에 당선되기까지 그의 노력을 살펴보자.
 

1944년 전남 나주시에서 태어난 최석호 시장은 광주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뒤, 제 3사단 백골부대에서 ROTC포병장교로 국방의 의무를 마쳤다. 1968년 첫 직장은 다름 아닌 미 평화봉사단의 한국어 강사였다. 당시 평화봉사단의 티켓은 편도 비행기만 주어졌기 때문에 다시 고국 땅에 돌아올 수 없었다.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남들에게 말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자리 잡고 난 뒤 그는 그의 열정과 젊음을 한국어 교육에 쏟아 부었다. 그 일환으로 미국의 SATⅡ(미국의 수학능력시험) 한국어를 창설하는 기반을 다지는데 일조하며 한국어의 우수성을 알리며 퍼뜨렸다. 또한 한국학교 연합회의 부회장직을 수행하면서 SATⅡ 한국어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한국어 모의고사 예상문제집을 편집해서 발행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어를 알려나갔다. 그가 자리 잡은 어바인시도 예외는 아니다. 어바인 고등학교와 그라나다 고등학교에 한글 과목을 창설하고 직접 가르칠 정도로 최 시장은 한글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이어 그는 어바인 주립대학교(UCI)에 한국어 과목을 개설하고 2년 동안 교수로서 한글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열정을 보였다. 

 

1993년 어바인시에 ‘Dr. Choi's Academy’라는 학원을 설립하며 어바인시의 교육의 질 향상에 힘썼다. 학원 설립 이후 6년 동안 시 교육위원을 지내면서 교육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대표적으로 어바인 지역의 아동 학습능력 향상과 공공 도서관 확충, 시설개선, 환경보전 운동을 벌며 지역에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2004년 시의원 당선과 2008년 시의원 재선을 거쳐 8년 동안 정치적 입지를 다져 2012년 11월 시장으로 당선됨으로 해서 전임시장 강석희 시장의 뒤를 이어 한인의 시장연임이라는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먼 타국에서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최석호 어바인 시장을 만나보자.



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에 보답


시장으로 당선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인 1세로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 가정을 꾸밀 수 있었던 것에 모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고 안전한 도시로 알려진 어바인에 교육위원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믿어주고 계속해서 시의원을 넘어 시장으로 까지 선출해주신 어바인 주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인 출신인 것을 모든 유권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인의 위상과 신뢰를 더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대방의 흑색선전에 피해가 많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억울했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상대 후보가 지역 주민들에게 저를 폄하하는 내용으로 전단지를 뿌리고 흑색선전을 했었습니다. 후에 언론을 통해서 래리 후보의 주장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시민들이 알게 됐지만 그때는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대응할 수 없었어요. 선거자금이 부족했거든요. 당선된 지금에서야 알게 된 내용이지만 래리 후보의 흑색선전이 역효과가 났다고 많은 유권자가 전해주더군요. 어바인시의 시민들은 흑색선전을 홀릴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가 제 나쁜 얘기를 하는데 기분이 좋겠어요? 저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차분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봉급도 없다시피 한 미국 정치인 남편을 먹여 살리고 묵묵히 뒤에서 조력해준 가족들에게 최석호 시장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선거기간 한인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셨겠습니다. 

“어바인은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인 시민권자로 유권자 수는 약 4천 명 정도 파악이 되고 있지만 모든 한인들의 수는 약 1만 5천으로 추산하고 있어요. 유권자들이 모두 투표를 한다면 후보들이 벌벌 떨만하겠죠? 때문에 한인 유권자가 모두 나와서 투표해주시길 당부하고 부탁해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이 저를 위한 모임도 만들어서 후원도 해주고, 6명 정도의 한인 학생들은 7월부터 선거당일까지 함께 도와줄 정도로 열정적이라 많은 도움과 격려가 됐습니다. 다만 한인들에게 각광받는 어바인시지만 한인들의 정치적 참여가 부족한 것이 아쉽습니다. 한인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여나갈 때 관심을 가져주시고 함께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타지에서 겪는 애환은 같은 한국인이 가장 잘 알고 대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장은 한 시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가장으로서 자신에게 점수를 매긴다면?

“정치를 하다보면 개인 생활시간을 많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죠.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가족들이 큰 불평 없이 이해해 줬기 때문에 정치에 더 열심히 매진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이야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줘서 장남은 의사가 되었고, 둘째인 딸은 변호사가 되었는데요. 학원을 운영하면서 밤늦게까지 남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서 집에 갈려고 돌아와 보면 차안에서 자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안타깝던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나요. 그러니 제가 100점 만점인 아버지라고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B’학점이나 받으면 다행일까요?(웃음)”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대한민국’

젊은시절 한국을 떠났기에 고국에 대한 추억이 남다를 텐데, 시장님에게 한국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습니까?

“학창시절의 친구들, 군대생활 그리고 고향 생각들을 해보면 제가 기억하는 추억들은 대부분 1960년대 추억뿐이네요. 지인들이 우스갯소리로 저를 놀리면서 한국의 60년대 남자상을 알고 싶다면 최석호를 만나보라고 해요. 군대를 제대하고 첫 직장이 생각지도 않았던 미국이 되는 바람에 사실 한국의 사회 경험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죠. 제가 한국을 떠난 해가 1968년이었기 때문에 그 때와 지금의 한국의 모습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가끔씩 조국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서 해외에 사는 저도 한국이 자랑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미국으로 떠나오신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에 정착하시고 힘드시지 않으셨나요?

“한국에서 군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찾다보니 첫 직장이 ‘미 평화봉사단’의 한국어 강사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 아니고요. 시험을 쳐서 뽑혀 오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왕복티켓이 아니라 편도티켓을 준거죠.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에 남아있게 된 겁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이 그만큼 나를 보내기 싫었나보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합니다.(웃음) 미국에 정착하고 힘든 것은 크게 없었지만 제가 LSU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하든데 도대체 강의를 말로만 하는 교수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미국인 여학생에게 먹지를 주고 그 대필된 노트로 공부를 했었죠. 지금은 하나의 추억이지만 당시에 교수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시장님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이 있다면?

“뉴욕의 노상에서 가발과 아이스크림도 팔아보고 호텔버스에서 보이 노릇도 하면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이 들었죠. 하지만 공부를 해야겠다는 꿈이 있어서 떳떳한 수단이라면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여름동안 뉴욕 길거리에서 다듬은 영어를 가지고 방학이 끝나고 교실에 들어섰더니 교수님이 ‘너 영어실력 많이 늘었다’라며 놀라시더군요. 한국에서라면 잠시 망설였을 일도 저는 당당히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성공한 인물로서 조언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는 다른 성공한 사람들과 달리 인생의 목표를 두고 뛰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어진 일에 열심히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가야할 길을 열어주신 것 같아요. 제가 조언하고 싶은 말은 비록 저의 작은 성공담이지만 조국과 미국 교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이 직장과 가정에 충실한 동시에 자신의 위치에서 내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넓은 안목을 가졌으면 합니다. 노력의 바탕에는 철저한 교육과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본지 2012년 연말특집호를 맞이해서 한국의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미국에 사는 한 교민의 ‘성공’을 한국인이라는 핏줄 하나로 전 국민이 함께 기뻐해 주심에 대해 조국애를 느끼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 한 도시의 한인 시장 당선이 그렇게 비중이 큰 사건일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한국의 매스컴에서 저의 당선 소식을 알렸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감동과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의 조국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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