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충무로의 대모, 연기 인생의 정점을 찍다
[이슈메이커] 충무로의 대모, 연기 인생의 정점을 찍다
  • 손보승 기자
  • 승인 2021.04.26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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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인 최초 오스카 연기상 수상

[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충무로의 대모, 연기 인생의 정점을 찍다

 

데뷔 56년 차 배우 윤여정이 한국 영화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1980년대 한국계 미국 이민 가족의 정착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에서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할머니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일상과 가까운 연기로 호평 받으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대업을 세웠다.

 

ⓒ후크엔터테인먼트
ⓒ후크엔터테인먼트

 

한국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
윤여정의 이번 오스카 수상은 한국 영화 102년 역사 최초의 연기상 수상이다.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전미 비평가위원회부터 미국 배우 조합상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까지 무려 40개에 가까운 트로피를 휩쓸었다. 이는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한 것에 버금가는 성과다.

윤여정이 한국 상업영화 기준으로도 저예산이라 할 수 있는 순제작비 200만 달러에 불과한 독립영화 한 편으로 글로벌 영화계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비전형적인 할머니 캐릭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극 중 순자는 손자인 데이비드(앨런 김)의 말처럼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다. 쿠키도 구울 줄 모르고 손주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투박한 욕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에 봉준호 감독은 “일반적인 할머니의 상을 비껴가는,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할머니 캐릭터라 어딘지 통쾌하고 좋았다”라며 연기의 특별함을 표현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가 ‘영리한 신 스틸러’라 평할 만큼 담백하게 대사를 읊고 행동하며 인물을 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상황을 그려내는 연기도 일품이었다. 또한 주변에서 심각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묵묵하게 혼자의 힘으로 잘 살아남는 미나리를 심는 캐릭터를 담아내며,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묵직하게 전달했다. 인디와이어는 “순자는 ‘미나리’의 감정적 핵심”이라며 “윤여정이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너그러움이 영화 속 어린 손주들과의 케미스트리로 잘 표현됐다”고 호평했다.

 

영화 ‘미나리’에서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할머니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은 일상과 가까운 연기로 호평 받았다. ⓒ판씨네마
영화 ‘미나리’에서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할머니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은 일상과 가까운 연기로 호평 받았다. ⓒ판씨네마

 

그간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베를린·베니스에서 한국 배우가 연기상을 수상한 적은 몇 차례 있었다.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을 시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2007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이 있었고, 2017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통해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심장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동안 한국 배우에게는 난공불락과 같은 존재였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역시 연기상 후보에 오르지는 못했다. 더욱이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보랏2: 서브시퀀스 무비필름’의 마리아 바칼로바,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스,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먼, ‘맹크’의 아만다 사이프리드까지 쟁쟁한 후보와의 경쟁을 이겨낸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은 1957년 ‘사요나라’의 우메키 미요시에 이은 두 번째다. 후보에 오른 경우도 ‘모래와 안개의 집’(2003)의 쇼레 아그다쉬루, ‘바벨’(2007)의 키쿠치 린코까지 단 4명에 불과하다. 또한 1947년생인 윤여정이 트로피를 안게 되며 해당 부문에서 ‘인도로 가는 길’(1984)의 페기 애슈크로프트와 ‘하비’(1950)의 조지핀 헐에 이어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수상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아울러 ‘두 여인’(1961)의 소피아 로렌(이탈리아어), ‘인생은 아름다워’(1998)의 로베르토 베니니(이탈리아어), ‘라비앙 로즈’의 마리옹 코티야르(프랑스어) 등 영어가 아닌 대사로 열연을 펼쳐 오스카 연기상을 수상한 여섯 번째 배우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윤여정은 한국 영화 102년 역사 최초의 오스카 연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BDS2006/Wikimedia Commons
윤여정은 한국 영화 102년 역사 최초의 오스카 연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BDS2006/Wikimedia Commons

 

스크린과 브라운관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
윤여정은 그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한국 배우계의 대모이다. 그는 대학 시절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연기 권유를 받아 1966년 TBC 3기 탤런트 공채에 합격해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듬해 드라마 ‘미스터 공’을 시작으로 ‘강변 살자’, ‘박마리아’ 등에 출연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그는 1969년 MBC로 이적한 뒤 1971년 드라마 ‘장희빈’을 통해 ‘천재 여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일약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워낙 악녀 연기가 탁월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거리를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해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에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광기 어린 하녀 ‘명자’ 역을 맡아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을 거머쥐었고, 스페인 시체스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도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충녀’에 출연하며 ‘김기영의 페르소나’ 불렸고, 김 감독 역시 ‘내 말을 이해한 유일한 배우’라고 극찬하며 윤여정을 아꼈다. 1972년 김수현 작가의 MBC 일일연속극 ‘새엄마’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면서 그는 명실공히 연예계 흥행 보증수표로 거듭났다.

하지만 윤여정은 1974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며 연기 인생을 중단하게 된다. 훗날 그는 대중에게서 멀어진 시간 동안 곤궁했고 외로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아시아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지역에서 힘들게 지내며 마트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래도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타지에서의 힘겨웠던 시간이 복귀 후 배우 생활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들을 다양한 연기의 각 지점에서 절묘하게 풀어냈다. 두 아이를 키워야 했기에 스스로 ‘생계형 배우’라 부를 정도로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그의 생활 연기는 남다른 깊이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뼈 있는 농담이 담긴 소감으로 ‘윤여정 어록’이 또 하나 탄생했다. ⓒBAFTA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뼈 있는 농담이 담긴 소감으로 ‘윤여정 어록’이 또 하나 탄생했다. ⓒBAFTA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1984년 연예계로 돌아온 후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넝굴째 굴러온 당신’, ‘굳세어라 금순아’, ‘며느리 전성시대’ 등 수 많은 드라마에서 존재감을 알렸고, 충무로에서도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부터 재벌 회장 부인, 투병 중인 남편을 두고 애인을 만나는 중년 여성, 폭력 집단의 대모와 성매매 노인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캐릭터에 한계를 두지 않고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였다. 특히 2003년 ‘바람난 가족’으로 인연을 맺은 임상수 감독의 2010년 작품 ‘하녀’에서 각종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싹쓸이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공원에서 성매매 활동을 하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 역할을 맡아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부터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올해의 여성영화제, 부일영화상 등 유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처럼 윤여정과 같이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드라마와 상업영화는 물론 저예산 영화까지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노장 배우는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한국 문화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윤여정은 2017년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를 낯선 환경에 던져가며 자신만의 연기 격조를 온전히 지켜낸 윤여정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후크엔터테인먼트
스스로를 낯선 환경에 던져가며 자신만의 연기 격조를 온전히 지켜낸 윤여정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후크엔터테인먼트

 

연기력과 입담으로 전 세계인 매료시켜
누구나 절정의 시대가 지났다고 여길 나이에 윤여정이 세운 또 하나의 성과는 ‘예능’이다.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 나영석 PD 사단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은 물론 패션 및 유머 감각, 젊은 세대와의 소통 방식 등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2013년 tvN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에서 “60세가 되어도 인생은 몰라요. 나도 처음 살아보는 거니까. 나도 67세는 처음이야”, “다 아프고 다 아쉬워. 내 인생만 아픈 것 같고,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고.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라고 후배들에게 무심코 건넨 말들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며 일명 ‘윤여정 어록’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입담은 이번 오스카 레이스에서도 두드러졌다. 미국 현지 영화제에서 계속해서 연기상을 받자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으니 상이 많구나 하고 있다”며 위트 있게 답변하기도 했고,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고상한 체한다(Snobbish)고 알려진 영국인들이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고 뼈 있는 농담이 담긴 소감은 그야말로 좌중을 폭소케 했다. 외신들도 ‘올 시즌 최고의 수상소감’, ‘윤여정이 MVP’라는 반응을 쏟아냈다.

윤여정이 미나리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특별하다. 한 웹 예능에 출연해 “어떻게 미국 오클라호마의 털사라는 곳까지 가서 호텔도 아니고 에어비앤비에 머무르며 ‘미나리’를 찍게 되었냐”는 질문에 “자신쯤 되면 TV나 영화를 할 때 어떤 감독도 날 가지고 연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좋으실 대로 하라고 한다. 그런 환경에 있으면 괴물이 될 수 있다. 그게 매너리즘이다”라며 “그런데 소통도 잘 안 되는 곳에 가서 미국 스태프에게 ‘What?’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Nobody’가 되는 경험을 할 때, 오로지 연기를 잘해서 이들에게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다잡게 된다.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이 ‘도전’이다”라고 강조해 울림을 줬다. 스스로를 낯선 환경에 던져가며 자신만의 연기 격조를 온전히 지켜낸 모습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주위의 반대에도 감행한 도전은 한국 영화계에 최초라는 역사를 쓰고 많은 이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꿈을 선물했다. 2009년 영화 ‘여배우들’에서 한류 여신으로 활약 중인 후배들에게 “난 재래시장이나 지킬게”라 말했던 그가 자신만의 감각으로 가장 먼저 세계무대를 접수하고 더 큰 무대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애플TV 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를 촬영 중인 윤여정의 배우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보며 다시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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