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_ 디지털 성범죄 Ⅰ] 본질 외면한 사회, 예견된 참사 불러와
[이슈메이커_ 디지털 성범죄 Ⅰ] 본질 외면한 사회, 예견된 참사 불러와
  • 손보승 기자
  • 승인 2020.05.13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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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본질 외면한 사회, 예견된 참사 불러와

 

 

ⓒPixabay
ⓒPixabay

 

지난 3월17일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100여 명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금전 대가를 받아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 유포한 ‘박사’ 조주빈이 검거됐다. ‘n번방’으로 대표되는 이번 성범죄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일이 아니다. 솜방망이 처벌과 음란물을 가볍게 여기던 사회 분위기 속에 디지털 성범죄는 창구만 달리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국민적 공분 일으킨 ‘n번방’과 ‘박사’

‘박사’는 1부터 9까지 이르는 숫자를 붙여 일명 ‘n번방’이라는 단체 채팅방들을 만들고 직접 제작한 성착취 영상을 유포한 조주빈의 닉네임이다. ‘박사’가 ‘n번방’을 포함한 10여개 이상의 단체 채팅방을 운영하며 성 착취 한 여성은 수십 명이었다. 운영자들은 신체 일부를 SNS에 노출하는 ‘일탈계’를 운영한 미성년자들이나 고액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피해자를 꾀어낸 경우도 많았다.

 

경찰조사 결과 텔레그램 ‘박사방’에는 최고 1만 명이 대화에 참가 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20~150만원에 이르는 돈을 지불하고 채팅방에 참가했으며 성착취 영상이 유포될 때면 누가 더 모욕적인 말을 하는지 경쟁했다. 경찰은 현재까지 회원 약 15,000여개의 닉네임을 확보했고 이들 중 30여명의 신원을 특정해 아동음란물 소지죄로 입건해 수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부따’라는 대화명으로 활동하던 ‘박사방’의 공범인 강훈에 대한 신상공개도 이뤄진 상태다.

 

n번방 사건이 전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킨 후 영상물 제작자와 유포자, 가입자 등의 신상공개과 엄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440만 명이 동의하는 등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각계에서 과거부터 이어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무관심과 솜방망이 처벌이 오늘날의 n번방을 낳았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지난 3월 여성 100여 명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금전 대가를 받아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 유포한 ‘박사’ 조주빈이 검거됐다. ⓒYTN 뉴스화면 갈무리
지난 3월 여성 100여 명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금전 대가를 받아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 유포한 ‘박사’ 조주빈이 검거됐다. ⓒYTN 뉴스화면 갈무리

 

솜방망이 처벌 속 진화한 디지털 성범죄

수법만 달라졌을 뿐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그동안 명맥을 꾸준히 이어왔다. 서버에 등록된 회원만도 무려 100만 명에 달했던 국내 최대 성인 사이트 소라넷은 성범죄의 온상으로 불렸다. 회원들은 강간을 모의하고 실제 실행하거나 성착취 촬영물을 공공연히 유포됐다. 끈질기게 이어진 경찰 수사 결과 개설 17년 만인 2016년 소라넷은 폐쇄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AVSNOOP’이 제2의 소라넷으로 부상해 미성년자 촬영물을 포함해 50만 건에 가까운 음란물을 게시했고 경찰의 적발로 2017년 폐쇄됐다.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이 이어지며 디지털 성범죄 집단은 표면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이후 이들은 경찰에 쉽게 노출되는 커뮤니티 대신 익명의 공간을 파고들어 산발적으로 조직화됐다. 보안이 철저한 텔레그램으로 이동해 ‘갓갓’의 n번방과 ‘와치맨’, ‘켈리’, ‘박사’ 등이 등장했고, 이들은 미성년자와 젊은 여성 대상으로 강간과 학대 등을 일삼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겁 없이 디지털 집단 성범죄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까. 답은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경찰이 미국과 유럽 경찰과의 공조수사까지 벌여 잡은 소라넷 운영자는 불과 징역 4년 판결에 그쳤다. 1심이 내렸던 14억이 넘는 추징금 선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AV스눕을 운영한 안모씨도 징역 1년6개월 선고가 전부였고 세계 최대 규모의 다크웹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모씨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2018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디지털 성범죄로 검거된 사람은 11,746명에 이르는데, 이 중 구속된 이는 271명으로 전체의 2.3%에 불과하다.

 

 

디지털 성범죄 처벌을 더욱 강력히 정비하자는 요구가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커져가고 있다. ⓒ정의당
디지털 성범죄 처벌을 더욱 강력히 정비하자는 요구가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커져가고 있다. ⓒ정의당

 

썩은 뿌리 도려낼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

전문가들은 n번방 이전 디지털 성범죄에 경종을 울리고 근절할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지만 수사기관과 사법부, 정부가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무고한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더 잔혹한 수법의 가해자들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사회단체 탁틴내일의 이현숙 상임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텔레그램 범죄가 과감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군중심리와 ‘절대 걸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해 온 사회가 오히려 범죄자들에게 동조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처벌을 위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 또한 묵살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성폭력 범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본질적인 해결을 위해 촘촘한 법망을 짜는 일이다. 정부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디지털 성착취 바이러스에 대해 무한의 책임을 갖고 무관용의 대처를 하겠다”고 밝혔고, 대검찰청 역시 ‘디지털 성범죄 사건처리기준’을 마련하고 성착취 영상물 제작 사범에 대해 최대 무기 징역까지 구형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남성이 ‘음란물’을 보는 것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만 여기는 사회적 인식 개선도 필요해 보인다. 성착취 촬영물이 경계심 없이 양산할 수 없는 강력한 규범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새로운 ‘박사’와 ‘갓갓’이 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썩은 뿌리를 도려낼 수 있는 법과 제도, 포괄적 성교육과 인식 개선 캠페인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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