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vs 짬뽕
짜장면 vs 짬뽕
  • 김갑찬 기자
  • 승인 2015.10.19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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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김갑찬 기자]



중국음식의 대표 메뉴 당신의 선택은?

한국의 외식 문화와 함께 성장해온 짜장면과 짬뽕



 

 

 


 

미국의 유명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 한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이 시에서 나타나듯 우리는 숲 속의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가 생기기 마련이다. 중국 음식점에 들어서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짜장면과 짬뽕의 사이에서 누구나 선택 장애를 경험한다. 인류 최대의 고민 중 하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길 정도로 이 둘의 선택은 어려운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짬짜면이라는 음식도 탄생하기 이르렀다.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짜장면

졸업식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짜장면을 먹던 추억이 누구나 있을 정도로 짜장면은 한국 외식문화의 시초가 되며 대한민국 음식문화를 이끌었다. 이처럼 최고의 배달 음식이자 한국인의 식생활에 결코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온 짜장면, 하지만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짜장면은 1883년 인천 개항과 함께 중국 산둥 지방 화교들이 인천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인천항에서 일하던 화교 출신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을 만든 것이 지금의 짜장면의 시초라는 것이다. 중국 요리는 조리법이 복잡해 대부분 조리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빨리 먹기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던 반면 짜장면은 손쉽게 만들어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짜장면의 장점 때문에 당시 화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짜장면은 일제시대 요정(고급 음식점)문화가 확산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게 된다. 고급 중식당들의 메뉴에 짜장면이 이름을 올리게 되고, 이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인 중국 요리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짜장면이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쟁 이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가 계기가 됐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중국 산둥 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해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했다. 여기에 6·25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기에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의 대중화는 가속화됐다.
 

  전문가들은 1970년대를 짜장면의 전성기라고 부른다. 쌀이 부족했던 시절 정부가 혼분식 장려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짜장면을 찾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가루로 라면이나 국수, 짜장면 같은 분식류를 만드는 업소도 이때 함께 호황을 누렸다. 졸업식이나 생일 때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짜장면집으로 향하는 것도 1970년대부터 생겨난 모습이라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부모들이 돈 걱정 없이 외식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중국집이었다. 
 

  우리는 짜장면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배달의 상징인 철가방이다. 광복 후 짜장면과 짬뽕으로 대변되는 중국 음식은 신속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급속히 대중화되었고, 철가방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배달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만들어 사용했지만 너무 무거운 데다가 음식물이 넘칠 경우 나무에 스며들어 위생적인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이후 플라스틱 배달가방도 만들었으나 이는 일반화되지 못했고, 알루미늄 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가 등장함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백색의 철가방이 등장하게 되었다. 
 

  짜장면의 가격도 물가에 따라 변했다. 1960년대 초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은 15원 수준이었는데 당시 쌀 80㎏ 한 가마니 가격이 3천10원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140원, 1980년대에는 350원으로 올랐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치며 짜장면 값은 급등했다. 1990년대 초기 1천300원이던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은 2000년대 경제위기를 전후로 3천 원에 이른다. 이때 쌀 한 가마가 20만 원이었다. 요즘 짜장면 한 그릇은 4천~4천500원으로 50년 동안 약 450배가 올랐다. 지금은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 변화가 국민 물가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중적인 음식으로 통한다.
 

  홍길동이 호부호형하지 못했듯 한국인은 ‘짜장면’을 한 때는 ‘짜장면’으로 부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문화교육부가 1986년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과 표준국어대사전에 ‘자장면’만이 표준어이며 맞춤법에 맞는 표기로 실렸기 때문이다. ‘짬뽕’은 ‘잠뽕’이 아닌데 ‘짜장면’은 ‘자장면’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짬뽕과 달리 중국 된장을 가리키는 ‘자장’과 한자어인 ‘면(麵)’이 결합한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비록 표준어는 ‘자장면’이었지만 언론매체 외에 국민 대부분이 ‘짜장면’으로 불렀고, 결국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에서 '짜장면'도 표준어로 인정했다. 

 

짜장면의 영원한 라이벌 짬뽕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로 한국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짬뽕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매운맛과 붉은색이다. 두 번째는 몇몇 채소와 더불어 오징어 등 해물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흔한 짬뽕 속 냉동 해산물을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다. 그 이전에는 돼지고기 등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부고속도로의 등장으로 냉동, 냉장 해산물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중국 음식인 줄 알고 있는 짬뽕은 중국어에는 없는 단어이며 짬뽕이란 음식조차 중국에는 없다. 뜻밖에도 짬뽕이란 음식의 이름은 일본으로부터 왔다. 그런데도 어떻게 짬뽕이 일식당이 아닌 중식당의 대표 메뉴가 된 것인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짬뽕의 유래는 일단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아니고 19세기 말 한국이나 일본에 나와 있던 중국인, 즉 화교들이 만든 음식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우리나라 짬뽕이 인천에서 자생적으로 생겼다고 하는 의견은 짬뽕의 기원을 중국 산동성 초마면에 두고 있다. 초마면은 주요리를 만들고 남은 육류와 채소 부스러기를 모아 볶다가 육수를 부어 만든 국물에 면을 말아 먹는 음식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위안스카이’라는 인물이 청나라 군대를 끌고 조선 땅에 들어올 때, 따라온 중국 산동성의 상인들은 인천의 중국 조계지에서 고향의 음식이 그리워 초마면을 만들었고, 이는 오늘날의 짬뽕 되었다는 설이다. 
 

  한편 처음부터 짬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음식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오늘날 일식주점 등에서 종종 접하는 ‘나가사키 짬뽕’이 그것인데 이 음식은 그 출발이 매우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나가사키 짬뽕은 당시 나가사키에서 ‘사해루’란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던 중국인 화교가 만든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중국 노동자들과 가난한 중국인 유학생들이 제대로 배불리 먹지 못하는 것을 본 주인이 저렴하지만 양이 넉넉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만든 것이 짬뽕이었다. 이 짬뽕도 초마면처럼 쓰다 남은 채소와 부스러기 고기에다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나는 싸고 풍부한 해산물 등을 볶아 중화면을 넣고 끓여 만든 음식이었다. 이 음식은 복건성 요리인 탕육사면을 변형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의 북부지역인 산동성 출신이 많았고 일본의 나가사키는 17세기부터 개항지였던 만큼 배로 드나드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주로 중국 남쪽 지역인 복건성이나 광주성 사람들이 많았다. 분명 레시피 상으로는 유사성이 많지만 엄연히 다른 요리였던 산동성의 초마면과 복건성의 탕육사면이 한국에서 짬뽕으로 정리된 것에도 이유가 있다. 비록 고향은 다르지만 타향살이를 하는 화교들 간의 교류와 커뮤니티 형성을 통한 음식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국과 일본 화교들 간의 교류가 짬뽕이란 요리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짬뽕도 오늘날 짬뽕처럼 매운 국물이 아니라 나가사키 짬뽕처럼 하얀 국물이었다. 우리나라 짬뽕에 고춧가루가 본격적으로 첨가된 것은 1970년대 이후 고춧가루가 보편화 되면서 부터다. 그전까지만 해도 고춧가루는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식당에서 마음대로 쓰기 어려운 식자재였다. 또한 1970년대 화교의 경제활동 제한으로 중식당의 주인이 화교에서 한국 사람들로 넘어가면서 짬뽕에 본격적으로 고춧가루가 들어갔다고도 한다. 동아시아 화교 문화에 한국인의 매운 문화가 또 한 번 뒤섞였다. 채소와 고기, 해산물이 어우러진 영양가 있는 고명에 쫄깃한 면발, 구수하고 매운 국물의 짬뽕 한 그릇에는 동아시아 3국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다. 짬뽕면 한 젓가락에는 하나의 문화로는 규정할 수 없는 진정한 어우러짐의 정서가 흐르는 것이다.
 

  저렴한 가격과 신속한 조리로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아 온 짜장면과 짬뽕은 ‘배달음식의 대표주자’, ‘서민들의 단골메뉴’, ‘최고의 국민 요리’ 등 온갖 수식어가 가득하다. 그만큼 친근한 메뉴이며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메르스로 인한 관광 산업과 외식 산업의 침체기 속에 맞이한 8월의 여름 휴가. 여행 전문가들이 지역별로 전통과 맛을 자랑하는 특색 있는 중국 음식과 함께하는 먹방 여행을 입을 모아 추천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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