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이슈메이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9.06.11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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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사상가이자 혁명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로 취임한 의암 손병희는 교세 확장 운동과 함께 출판사인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 동적 등의 학교를 인수해 민족의 교육, 문화 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직을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하던 손병희는 1919년 민족대표 33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한다. 그는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획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처럼 꺼져가는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헌신한 의암 손병희를 이슈메이커에서 조명했다.

 

동학농민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다

1882년 동학에 입문한 손병희는 제2세 교조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자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운동을 이끈다.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하지만,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전했다. 송병희는 원산, 강계 등지로 몸을 피했고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했다. 1901년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손병희는 종래 무력항쟁의 노선에서 민족계몽운동으로 방략을 변경한다. 일본에서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의 망명인들과 교류한 손병희는 2차에 걸쳐 총 64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일본 유학을 주선하고 신문물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함으로써 민족의 동량(棟樑)을 육성했다. 또한 1904년에는 갑신개화혁신운동을 추진해 교도들에게 단발을 지시하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간다. 아울러 심복인 이용구를 국내에 파견, 진보회를 결성해 신생활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이러할 즈음 한국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은 순식간에 전쟁의 도가니가 되었고 한국인의 피해는 극심했다. 어느 편이 이기던 한국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전쟁이었으나, 손병희는 이 전쟁이 조국독립의 호기로 파악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견한 그는 부국강병의 대책을 세워 국가만전(國家萬全)을 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진보회를 앞세워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을 규합해갔다. 그러나 이용구가 이끄는 진보회는 손병희의 뜻과는 달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로 변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 행위를 자행했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그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함으로써 친일화된 진보회와의 단절을 서두르는 한편 이듬해(1906년) 귀국한다. 이후 손병희는 사태수습을 위해 일진회에 가담한 이용구 등 천도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했다. 당시 손병희는 일진회에 의해 잠식당한 천도교의 교세를 만회하여야 할 뿐 아니라 심각한 재정문제도 눈앞의 급무였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만회를 위해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했다.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사업회

 

민족 계몽을 위한 노력, 그리고 3·1운동

정교 분리정책으로 교세 확장에 힘쓴 손병희는 민족 계몽을 위한 운동을 구체화한다.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세워 <천도교월보>를 발행한 손병희는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문창, 보창, 명신, 양영 등 수십 개의 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을 확대했다. 당시 손병희는 무력투쟁에 대한 한계를 느꼈고, 교육과 문화 등 국민계몽운동이 구국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1919년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측근들에게 독립운동의 세부추진계획을 일임했다. 이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던 기독교 측과 연합하기로 하고 기독교계의 남강 이승훈과 교섭을 시작했다. 이어 만해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의 동참이 이루어졌으며, 유교계와의 연계도 시도했다. 또한 연희전문, 보성전문, 세브란스 의전 등 각 학교 학생들이 추진하던 독립운동계획도 통합했다. 각계 인사들은 3.1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2만1천여 매의 선언서가 인쇄를 마치었으며, 전국 각지로의 배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손병희를 필두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민족대표가 서명함으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3월 1일, 29인(33인중 4명 불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손병희의 주도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만세삼창을 끝으로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해 자진 피체되었다. 손병희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그러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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