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헌신과 봉사의 삶을 남긴 이시대의 성인
[이슈메이커] 헌신과 봉사의 삶을 남긴 이시대의 성인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9.01.31 09: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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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헌신과 봉사의 삶을 남긴 이시대의 성인
“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의 의사가 되겠다는 평생의 약속을 지키다”
 

 

최근 한 프로그램에서 부산에서 활동했던 위인으로 소개된 장기려 박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받기도 한 장기려 박사는 평생 크리스천의 자세로 삶을 살았다.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생을 마치기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벗으로 진정한 나눔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를 이슈메이커에서 조명했다.
 
전쟁에서 시작된 봉사와 헌신
 
1928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한 장기려 박사는 졸업 후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입국하여 한국 외과계의 권위자 백인제(白麟濟) 교수의 제자가 되었다. 1938년 경성의전 외과학 강사로 근무하다가 경성의전 입학 당시 돈이 없어서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던 크리스천으로서 다짐을 지키기 위해 1940년 기독교 계열의 평양 기휼병원 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40년 9월「충수염 및 충수복막염의 세균학적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해 부산에 정착했다. 장기려 박사가 부산에 온 지 3일 후인 12월 21일에 그는 제3육군병원에 취직되어 약 6개월 동안 봉사하게 되었다. 이후 1951년 6월 20일 한상동 목사와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 선생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전영창 선생은 졸업을 일주일 남겨둔 채 조국을 위하여 5천 달러를 모금해 귀국했고, 이 돈이 복음병원의 초석이 되었다.
 
이후 장기려 박사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을 역임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 신앙생활로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때가 평양 기홀 병원에서 사면초가를 극복한 시절이라고 한다면, 의사로서 처음 뜻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때가 초기의 복음병원 시절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음교회는 먼저 교인들의 헌금으로 송도의 땅 1만 5천 평을 구입했으며, 건축자재는 말스베리 선교사가 AFFAK에 가서 원조물자를 구해왔고, 건축비는 말스베리 선교사가 친구들에게 편지해서 1954년 3만 달러를 얻어서 고려신학교 셋 채를 지었고, 1955년에 다시 3만 달러를 얻어서 약 30병상의 현대식 복음병원 건물을 짓게 되었다.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에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1953.3~1956.9),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학장으로(1956.9~1961.10), 서울 카톨릭의대 외과교수로(1965~1972.12)봉사하기도 했다. 장기려 박사는 1959년 2월에 기존에 연구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성공해 이식수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이로 인해 1961년에는 대학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부산대학에 ‘부산모임’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은 ‘처음에는 개인적인 전도와 구원을 위해 성경공부를 하였고, 후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했다. 이는 평소 장기려 박사가 평화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59년에는 일신병원장 메켄지(Dr. Helen Mackenzie), 내과의사인 이준철, 치과 의사인 유기형 등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해 행려병자들을 돌봤다. 이런 노력은 장기려 박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1968년에는 채규철, 조광제, 김서민 등과 함께 의료보험조합을 만들 것을 합의했고, 그해 5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조합원 700명으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했다. 병원의 문턱이 높았던 당시, 적은 돈을 내고 “건강할 때 이웃 돕고, 아플 때 도움받자”라는 기치로 시작한 이 운동은 많은 영세가정에 의료의 길을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 정부가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기 10년 앞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로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의 개원을 가능하게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는 1976년 6월 복음병원을 은퇴했고, 이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했다.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별세했으며, 향년 84세였다.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현대인들에게 울림을 주는 삶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로 불린 성산 장기려 박사는 이면과 표면의 경계를 허문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감출 것이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를 드러냈다. 진실과 정직을 포기하느니 감옥행을 결심할 정도였다. 1950년대 초반, 장기려 박사는 수술 중에 출혈 지점을 잡지 못해 결국 환자를 사망시킨 일이 있었다. 장 박사는 경찰서에 가서 자기의 실수로 환자가 죽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경찰은 “면허증 있는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소” 라며 풀어주었다. 그의 이런 고백은 그의 생애에서 반복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또 다른 인간됨은 환자가 가진 권력·돈·신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 박사는 이북에서나 이남에서나, 그러니까 젊었을 때나 나이가 많았을 때를 막론하고 자기 집에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했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아내가 40년 만에 남편의 사진을 받아들고 자식들에게, “두 개 가지면 벌 받는 줄 아시는지 번번이 거지에게 옷 벗어 주고 퍼렇게 얼어서 들어오셨다”고 전했다. 이처럼 그는 신분이 높든 낮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 위인이다.
 
장기려 박사는 약 500여 편의 글과 90여 편의 번역 원고를 남겼으며, 대부분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봉사, 글을 쓰는 목적이 비기독교인과의 소통을 위한 목적이었다. 세대와 계층이 단절되고 불화와 분단이 심화되는 현대사회. 연말연시 소외된 이웃을 위한 성금모금이 예년 같지 않다는 뉴스가 이슈가 되는 현실에 봉사와 헌신의 삶 살아간 장기려 박사를 우리가 다시금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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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윤 2019-05-28 17:37:57
장기려선생님은참대단해!(인덕초등학교 2학년장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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