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이슈메이커]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9.01.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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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한국 천주교 역사의 한 획을 순교자
 

 

한국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의 포교활동이 아닌 학문을 배우면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천주교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자 1831년 한국 천주교회가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되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이후 4번의 큰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한국 근대 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며 종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가 발표한 통계인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16>에 따르면 2016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전국 16개 교구가 집계한 신자 수는 574만 2천여 명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가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순교가 있었다. 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를 이슈메이커에서 조명했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부
 
충청도 솔뫼(현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출생 몇 년 만에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지금의 미리내 성지 인근 은이공소)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인 모방신부가 은이공소에 왔을 당시 세례를 받았다. 모방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 5일)을 전후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했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했다. 모방신부는 박해 로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김대건 신부는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했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했고 김 신부는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김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해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 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해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라파엘 호에 승선해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다.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그가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하던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해 백령도에서 중국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그곳에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김 신부는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고, 당시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이후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의 사상
 
김대건 신부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편지들과 선교사들의 편지뿐이지만, 그가 사형장에서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했듯이, 그는 하느님과 한국 천주교를 죽기까지 사랑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신학교 교육과 그의 마음에 축적되어 있던 가문의 신앙과 한국 전통 문화였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김 신부가 지녔던 사상의 중핵은 효애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부터 신자들이 공통으로 소유해 온 전통적 신심의 바탕은 ‘대군대부’ 사상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류의 왕이며 공동의 아버지로 믿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왔던 김대건 신부의 의식 바탕에는 전통적 신심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공경한 신심은 한국인이 최고의 가치덕목이며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 왔던 효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 효의 근본정신은 귀중한 생명을 준 생명의 근원이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부모에 대한 보은 행위이다. 그렇기에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벌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신자들에게 효애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순교를 통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효애심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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