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서간도 독립운동의 선구자
[이슈메이커] 서간도 독립운동의 선구자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8.12.2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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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물 선정위원회- 일송(一松) 김동삼

[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서간도 독립운동의 선구자
한 평생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만주벌 호랑이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국권을 피탈 당하자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들은 간도 지방으로 이주했다. 민족대표 39인 중 한 사람이자 간도지방에서 대한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일송(一松) 김동삼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며,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가면서도 작은 단위의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고 이념과 방략에 따라 나뉜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행보를 지속했다. 이처럼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김동삼을 이슈메이커에서 재조명했다.
 
전통적 유림지역에서 계몽과 독립을 꿈꾸다
 
경북 안동의 전통 유임 집안에서 태어난 김동삼은 영남지방에서 선구적인 교육기관이었던 협동학교를 설립해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보수 유림의 강한 안동지역의 특수성으로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김동삼은 1907년 유인식, 이상룡과 3년제 중등학교를 설립해 당시 국제정세의 인식과 함께 서양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김동삼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화 되어가는 국가적 위기에서 구국을 위한 방안으로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협동학교 권면문에서 김동삼은 서구의 선진문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개화하는 길이 구국임을 강조하고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해 국가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계몽운동에 대한 확신과 지식인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그러나 협동학교는 보수 유림의 반발해 부딪쳐 어려움을 겪게 되고, 특히, 1909년 협동학교 교직원과 학생 30여 명의 단발은 유림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후 교감과 교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시련으로 협동학교는 폐교위기까지 있었으나, 김동삼을 중심으로 김하정, 김정훈 등 청년교사의 헌신으로 1911년 23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김동삼의 계몽운동은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이어진다. 1909년 3월에 설립된 안동지회는 매월 2회의 시국강연회를 개최해 법률, 민권, 사회, 단체, 교육 등 광범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다방면으로 자금을 조달해 협동학교를 지원하거나 국내 각 처에 초중등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또한,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으로 학교에 취학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특별과정을 설치해 야간이나 휴일에 교육하는 등 대중교육도 실시했다.
 
김동삼은 1909년 10월 영남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동청년단이라는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한다. 대동청년단 결성 당시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계기로 한국병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당시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는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지방에 치우쳐 영남지역에도 비밀결사조직에 대한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김동삼은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을 중심으로 대동청년단을 결성했고, 단원의 대부분은 영남 지역의 청년들과 신민회,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다. 이후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을 피탈 당하자 독립운동의 무대를 간도로 이전하게 되었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다
 
일가를 이끌고 현재 길림성 삼원보에 도착한 김동삼은 간도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했다. 1911년 4월 경학사라는 자치단체 창설에 관여한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을 맡았고, 아울러 경학사 취지서를 발표했다. 경학사 취지서에는 일면 민생, 일면 교육이라는 두 가지 목표 아래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지개척, 이주민 안정책을 도모하고자 내용이 담겨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한 김동삼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함께 백서농장을 창설해 대일무장투쟁에 대비했다. 일제가 간도지역을 무력으로 탄압하고자 하자 김동삼은 상해 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참여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서로군정서 독립군들은 국내로 잠입해 주요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경찰과 밀정을 처단했다.
 
독립군과 맞붙어 대패한 보복으로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3,700여 명의 무고한 한국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간도참변 이후 임시정부의 통합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자 1922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고, 김동삼은 의장에 선출되었다. 통합을 주장한 김동삼의 노력에도 이해관계에 따른 각 독립운동단체의 충돌은 수습되지 않았고 그는 의장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이후 통합단체인 대한통군부에 이어 대한통의부를 출범시킨 김동삼은 최고지도자인 총장에 추대되었고, 통의부는 정의부로 재탄생, 김동삼은 참모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1925년 7월 내각책임제로 바뀐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이상룡은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발령했으나 김동삼은 끝내 사양하고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김동삼은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3부의 통합을 주도하면서 민족유일당 조직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1931년 김동삼은 하얼빈의 옛 동지인 정진영 집에 들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에도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않았던 김동삼은 가족을 동원한 회유에도 “이제 더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유언을 남기며 1937년 4월 13일 5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만해 한용운이 시신을 서울 정릉 심우장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고,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해 한강에 뿌려졌다. 독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일생의 마지막까지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일송(一松) 김동삼. 그의 일생과 업적에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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