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하는 사람들의 유니온
일못하는 사람들의 유니온
  • 박경보 기자
  • 승인 2015.02.16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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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박경보 기자]



공감받는 ‘푸념’들의 공유


힘든 2030 세대의 페이스북 모임에 관심






커피포트를 들고 가다 벽에 부딪혀 깨뜨린다. 근무시간을 착각해 너무 일찍 출근했다. 외장하드디스크 파일을 복사하다 모두 지워먹었다. 이런 일 못하는 사람들의 푸념들이 페이스북 담벼락에 즐비하다. 지난해 7월에 만들어진 페이스북 모임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에는 이런 푸념들을 서로 고백하고 위로하는 3500여명이 모였다. 



일 못하는 사람들의 푸념공간

이 모임은 성공회대 신학대학원생 여정훈 씨가 만들었다. 일하고 있던 시민단체를 그만두면서 왜 나는 일을 못하는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일을 하면서 여 씨는 자신이 상하관계, 위계질서 등의 조직적 분위기와는 잘 안 맞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일을 잘하고 못하는 건 개인의 역량 차이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그 구조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할 수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자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고 했다. 가입 이유도 다양하다. 일부 회원들은 일 잘하려는 세상에 일 못하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와 같은 반항적인 이유를 들었다. 위로받고 싶어서, 내 이야기 같아서 등도 있었다. 회원 대부분은 2~30대다. 말단 사원, 대학원생, 단체 활동가 등이 많다.


  같은 자료로 엑셀 프로그램을 돌릴 때마다 다른 수치가 나오거나, 새로 산 노트북 전원을 못 꺼서 퇴근을 못하는 웃기고 슬픈 글들이 넘쳐난다. 어떤 이는 처음으로 양면 복사에 성공한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암수 한 쌍인 줄 알고 번식을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두 마리 다 수컷이었다는 동물원 관련 기사를 링크해 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투쟁보다는 이렇게 떠드는 것이 요즘 20~30대가 노동을 사유하는 방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면 된다는 성공 신화가 깨진 사회에서 이 세대가 할 수 있는 풍자 놀이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유니온으로의 진화

조합원은 3500명을 훌쩍 넘겼다. 관심이 몰렸던 ‘일못유’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페이스북 페이지의 공개 범위 설정도 공개에서 비공개로 변경했다. 그런데 그 사이 웃기고 슬픈 사연을 가진 또 다른 유니온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일도 잘하고, 개그도 잘 하는 센스를 겸비하면 인기를 얻는 시대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몸부림이 시작됐다. 이들은 각각 ‘개그 못하는 사람 유니온’, ‘인기없는 사람 유니온’을 만들어 새로운 소통을 꿈꾸고 있다. ‘개그 못하는 사람 유니온’ (이하 개못유)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쓸데없이 진지한 사람들, 개그를 쳐도 남들이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들이 모여 있다. 개못유의 운영자 조종현 씨는 “자유롭게 떠들고 즐기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고 유니온 개설 이유를 밝혔다. 일못유의 조합원이기도 한 조 씨는 일도 못하지만 개그도 잘 못하는 자신을 한탄했다. 재미가 없으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시대에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개못유를 열었다. 이곳에는 팍팍한 일상에 치여 개그감을 상실한 조합원들의 자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이슬란드가 있으면 어른슬란드는 없나요?”, “신발끈이 풀어져서 발끈”, “왜 제가 드립을 치면 그 밑으로 댓글이 안 달릴까요? 의문입니다. 개그할 때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너무 생각해서 고민이에요. 제가 너무 소심한가요?”, “우리 개못유에서 건배 제의하는 개그는 언제쯤 어떻습니까?” 등의 조합원 글이 호응을 얻고 있다. 조씨는 새로운 조합원을 기다린다. 언젠가는 웃길 날이 반드시 웃길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자신은 남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스스로 인정한 사람들은 ‘인기없는 사람 유니온’ (이하 인없유) 페이스북 페이지에 개설했다. 인없유 운영자는 “SNS나 블로그를 하다 보니 스스로 상품이 되는 것 같았어요. 가끔, 이게 정말 내 모습인가 싶을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야 제가 주목을 받잖아요. 그렇다 보니, 인기라는 것에 강박이 생겼던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는다. 더 이상 인기상품이 되지 않기를 선언한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인없유 페이지를 개설했다. 이곳은 인기없는 사람들의 소심한 저항도 위로를 필요로 하는 공간도 아니다. 하지만, 인없유 조합원들이 남긴 흔적은 웃음 짓게 만든다. 




 


  인없유는 페이스북 비공개 클럽이다. 팍팍한 삶이지만,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면 인없유를 찾아가보면 좋을 듯 하다. 사용자들이 왜 자신은 인기 없는 사람인지에 대한 한탄 등과 같은 각종 사연을 보며 위안삼거나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과 개그 못하는 사람 유니온에서 인기없는 사람 유니온까지, 자꾸 못 하거나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따로 유니온을 만들어 뭉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한 전문가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압박하는지 보여주는 현상이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이 얼마만큼 상품화를 요구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현상입니다”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웃기고 슬픈 현실을 반영하는 ‘유니온’ 문화가 어디까지 발전해나갈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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