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근대 신여성의 효시
[이슈메이커] 근대 신여성의 효시
  • 임성지 기자
  • 승인 2018.10.10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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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임성지 기자]

근대 신여성의 효시

소설 ‘경희’ 발표 100주년, 재조명되는 나혜석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30일까지 교보문고 광화문점 내 전시 공간에서 ‘그림, 신여성을 읽다 - 신여성의 탄생,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작품전’이 개최되었다. 이번 전시는 여성 작가 나혜석 소설‘경희(1918)’ 발표 100주년을 기념해 기획되었다. 소설 ‘경희’는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 이름을 제목으로 한 첫 소설로 주인공 경희를 중심으로 그 당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권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한 나혜석, 근대 신여성의 효시로 불리는 그의 삶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근대 신여성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나혜석은 다양한 부분에서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1986년 4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당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예술적 자질과 외모를 지녀 주변의 기대를 받았다.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둘째 오빠인 나경석의 권유로 17세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해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1919년 일본 유학 시절 당시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나혜석은 3월 25일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당시 조혼을 강요하는 풍습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으로 첫 유와 개인 전람회를 개최한 나혜석은 유학 시절 약혼자였던 시인 최승구가 죽은 후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했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조건으로 김우영에게 4가지의 약속을 요구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약혼자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김우영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요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김우영이 만주 안동(지금의 단둥) 부영사가 된 후 안동에 살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화가로서의 나혜석의 작품은 크게 2기로 나뉜다. 그가 유럽에 가기 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다면 그 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나혜석의 <자화상>은 1930년대에 그린 유화로서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1점도 없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나혜석은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했으며,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했다.

 

인격체로서의 여성을 원하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으로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했다. 1927년 남편과 세계 일주 중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여남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으며, 인간 평등에 기초한 참정권 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 문제를 소개했다. 이런 그의 활동은 능동적인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되었다. 남존여비라는 당시 시대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여성상을 제창했다. 그는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했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그의 작품은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지식인 등 지배층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나혜석은 결혼은 여성을 억압하고 옥좨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이혼의 비극은 여성 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해 화제가 되었다. 또한,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으로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보았고, 서로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불행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콜중독자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강조했다.

 

김우영과의 이혼으로 나혜석은 여권신장과 작가로서의 삶에 매진한다. 그는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 조선관에서 개최된 소품전의 실패와 아들 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 생활을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에서 사망했다.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여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활동한 나혜석. 당시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그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하지만, 당시 금기에 대해 과감하고 용기 있던 그의 행보가 현재 다양하게 표출되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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