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人 II - 序] 풍운아, 근대 일본의 서막을 열다
[로그人 II - 序] 풍운아, 근대 일본의 서막을 열다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5.01.0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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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의 설계자이자 일본의 국민적 영웅
[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로그人 II - 序] 사카모토 료마





풍운아, 근대 일본의 서막을 열다


메이지 유신의 설계자이자 일본의 국민적 영웅





우리나라에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라는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에선 전국시대 영웅들을 누르고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 1위'에 선정되곤 하는 것이 료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현대에는 '메이지 유신의 서막을 연 개혁가'라는 료마의 혁신적인 이미지가 일본인들에게 귀감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언급될 정도로 일본인으로부터 국민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료마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밝혔고,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2010년 출범 당시 '료마 리더십'을 내걸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봉건체제의 계급의식과 신분의 벽을 깬 그의 극적인 인생은 소설과 드라마에서 자주 다뤄진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와 2010년 방영돼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이 그 예다




새로운 일본을 꿈꾸다


막부 말기 일본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그는 격변기 짧은 기간의 치열한 활약을 통해, 일본이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재탄생 하는 길을 여는데 기여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널리 추앙 받기도 한다. 1835년에  태어나 1867년 33세로 숨진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사에 남을 만한 활동을 벌인 것은 암살되기 직전의 단 3년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그를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로 드는 것은 앙숙이었던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 도쿠가와 막부의 정권 포기 선언 등을 이끌어낸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독창적이고 선견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오늘날 일본 시코쿠 고치(高知)현 고치시, 당시의 도사(土佐)번 고치성에서 태어났다. 조닌(町人)이었다가 최하급 무사 신분 고시(鄕士)를 획득한 집안이었다. 12살 때 쿠스야마쥬쿠(塾)에 들어갔지만 친구와 심하게 다투어 함께 퇴학당하고 14살 때 히네노벤지의 도장에 들어가 오구리(小栗)류의 검술과 유술을 익혔다.

  가쓰는 막부가 건조한 증기선 지휘관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근대적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양이(攘夷)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 준 것도 가쓰였고, 료마는 사이고의 배려로 사쓰마번의 보호를 받으며 동지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 료마가 주도해 세운 일종의 무역, 해운회사)를 결성했다. 료마의 생각은 번과 막부 차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향하고 있었다.





삿조동맹, 막부체제 종식의 서(序)


1865년 6월 29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사쓰마번의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만나, 조슈번이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쓰마번이 명의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사이고가 승낙하자 료마는 나가사키의 가메야마샤추에 구매 주선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조슈번의 이토 슌스케(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유신 전까지의 이름)가 나가사키에서 8월 중순 영국 상인 토머스 B. 글로버에게 총기 7,300정을 9만2,400량에 매입했다.


  이즈음 료마는 사이고의 의뢰로 야마구치를 방문해 군량미 조달을 요청해 조슈번이 500섬을 공급키로 합의했다. 12월 초에는 사쓰마번이 야마구치에 사자를 보내 군량미 지원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했다. 군함은 10월 18일 역시 글로버에게 3만7,500량에 매입했다. 군함 매입비는 조슈번이 지불하고 명의는 사쓰마번으로 하며 운영은 샤추가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듬해 1866년 1월 21일 료마의 주선으로 교토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한 끝에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 이른바 삿조(薩長)동맹이 이루어졌다.




  이 동맹이 료마의 큰 업적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료마가 처음부터 사쓰마번의 지시에 따라 동맹을 추진했다는 설도 있어 그의 기여도를 두고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1864년 조슈번이 후원하는 존왕파 사무라이들이 교토로 진격했지만 막부 연합군에 패했다. 이후 조슈번은 든든한 재정을 바탕으로 군사력 근대화에 주력했고, 료마가 주선한 사쓰마번과의 동맹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사쓰마번도 조슈번과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막부에 적의를 품고 있었다. 삿조동맹은 일종의 상호방위조약, 즉 막부가 어느 한 쪽을 공격하면 서로 지원하는 동맹이자 사실상 막부 타도 동맹이기도 했다.





대정봉환, 막 내린 도쿠가와 막부체제


1866년 여름 막부는 조슈번을 공격했다. 사쓰마번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조슈번은 막부군을 참패시켰다. 료마는 가메야마샤추의 배로 조슈번을 지원했다. 료마는 1866년 이 때부터 대정봉환(大政奉還), 즉 막부가 정권을 일왕 조정에 반환하는 것에 관한 구상을 내놓고 1867년 2월 하순부터 도사번의 참정(參政) 고토 쇼지로를 설득했다. 고토는 도사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를 설득하여 료마의 대정봉환론이 도사번의 공식 입장이 됐다.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봉환하고 상하 의정국을 설치하여 의원을 두며, 외국과의 교류를 위해 널리 공의(公議)를 취하는 것”이 골자였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막부 무력 타도에 주안점을 둔 데 비해, 료마와 도사번은 무력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평화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1867년 10월 3일 도사번은 대정봉환 건의서를 막부에 제출했고 료마는 10월 10일 막신 나가이 나오무네에게 건의를 수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13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성에서 번주 회의를 소집하자 료마는 고토 쇼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만일 당신 한 사람의 실책으로 이 절대적인 호기를 놓친다면 그 죄는 천하가 용서치 못할 것”이라며 대정봉환에 전력을 다해줄 것을 촉구했다. 결국 10월 14일 대정봉환이 최종 결정됐다. 료마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제도와 강령의 작성에 들어갔다.


  1867년 12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군대가 교토를 장악했고, 이듬해 1868년 1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촉구에 따라 메이지 일왕은 왕정복고를 공식 선포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왕정복고와 막부폐지에 반발해 저항했지만 교토에서 대패하고 에도로 후퇴한 뒤, 1868년 4월 막부군 사령관 가쓰 가이슈가 에도를 포기했다. 260여 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체제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3년의 활동으로 일본 역사에 남다


1867년 12월 10일 료마는 나가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가와라마치(河原町) 오우미야(近江屋) 2층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료마는 오우미야 종업원이라 생각하여 방심하고 있었다. 료마는 머리에 칼을 맞아 사망하고 나가오카는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 당시 나이 31세. 괴한들의 정체는 막부의 별동대 신센구미(新選組)라는 설과 막부가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결성한 미마와리구미(見廻組)라는 설이 있다. 어느 경우든 막부 상층부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료마는 1864년 7월에도 교토의 데라다야(寺田屋)에서 신센구미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마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길을 연’ 국민적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이에 따라 그에 관한 과장된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가 검술의 달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불분명하며(그는 권총을 선호했다), 허풍이 심한 성격이라는 주위 사람의 증언이 있고, 유달리 돈을 밝혔다는 평가도 있으며 엽색 행각도 심한 편이었다. 삿초 동맹, 가메야마샤추 설립, 대정봉환을 비롯한 정국 구상 등을 전적으로 료마의 독창적인 업적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료마가 지속적으로 접촉한 영국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글로버 상회는 아편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영국의 자딘 매디슨 상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글로버의 직함도 ‘매디슨 상회 나가사키 대리인’이었다. 료마가 당대의 유력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당시 일본 최대의 서양 무기 구매창구인 글로버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심지어 료마가 사실상 ‘서양 무기상의 세일즈맨’ 구실을 한 셈이라는 시각도 있다. 


  료마는 글러버로부터 자금과 군수물품을 대여 받았고, 삿조 동맹은 료마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시대를 열었다. 일본의 메이지 개국의 배후에 군산복합체의 음모가 있었다는 흥미로운 해석이다. 어쨌거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도약하고 아시아의 대표 국가로 자리 잡았다. 


  많은 논란에도 불과하고 사카모토 료마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굳은 의지와 비전, 유연하고 열린 사고, 다양한 입장의 세력들을 오가며 타협하고 중재하는 능력 등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격변의 시기 몇 년 간의 활동을 통해 메이지 유신의 서막을 열고 일본 역사에 지워질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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