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Focus] 유령처럼 숨어 ‘재능’을 파는 사람들
[Social Focus] 유령처럼 숨어 ‘재능’을 파는 사람들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4.11.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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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확대되는 대필 시장, 전문화되고 있는 대필작가
[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Social Focus] 대필의 세계




유령처럼 숨어 ‘재능’을 파는 사람들


날로 확대되는 대필 시장, 전문화되고 있는 대필작가






지난 5월 개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가 있다. 2014년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그녀(Her)」의 남자주인공은 다른 이들의 편지를 대신 작성해주는 ‘대필작가’이다. 그가 써내려가는 편지들은 듣고 있기만 해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적이다. 영화는 이처럼 자신의 감정까지도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주는 세상을 꼬집고 있다. 이제 글쓰기는 개성이 아닌 ‘기술’이 되어 버렸다.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기술’, 대필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지난 6월 출간된 힐러리 전 장관의 회고록 ‘힘든 선택들(Hard Choices)’은 ‘사전주문 100만 부 달성’이라는 이슈 외에도 ‘대필작가에 의해 쓰인 책’이라는 점이 밝혀져 크게 주목받았다.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인 힐러리 전 장관의 두 번째 회고록인 이 책은 3명으로 구성된 ‘유령작가팀(Ghostwriter)’의 도움을 받아 작성됐다고 한다. 국무장관 시절 그를 보좌했던 댄 슈워린 전 상원의원과 작가 이단 겔버, 힐러리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테드 위드머가 그들이다. 또한 힐러리의 다른 저작물인 ‘마을이 나서야 한다’와 ‘살아있는 역사’도 모두 유령작가의 작품이라 밝혔다. 



수천만 원 호가하는 유명인 대필 자서전


  정치인과 기업인, 연예인 등 유명인들의 유령작가 고용은 드문 일이 아니다. 외국에서 대필작가는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거나 일정이 바빠서 글 쓸 여유가 없는 유명 인사들의 글을 고쳐주거나 대신 써주는 직업으로 통한다. 대필작가는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지 않는 원저자가 쓴 초고를 다듬고 편집해서 책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거나, 원저자에게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대로 해당 분야를 연구해서 책을 써주게 된다. 자서전을 쓰기 위해 대필 의뢰인이나 주변인들을 인터뷰하고 다양한 사실들을 조사해서 원고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요즘 외국에서 대필작가의 역할은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은 출판사가 대필작가들을 고용해서 소설을 쓰게 하고 이를 시장성 있는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경우가 상식처럼 되어있다.


  국내에서 대필작가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정치인의 자서전, 기업 CEO의 홍보용 자기계발서, 중소기업인의 소장용 자서전은 물론, 연예인 이름을 내건 각종 실용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이나, 대우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은 나름 업계에서 유명한 유령작가가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기업인, 정치인, 연예인 자서전은 80~90%가 대필이라는 이야기까지 돈다. 출판계 종사자들은 “그들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다. 몇 달씩이나 책 쓴다고 투자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라며 입을 모은다. 이런 사례들은 의뢰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필해 주는 작가들 쪽에서도 비밀에 붙이기 때문에 쉽게 알아낼 수가 없다. 의뢰자는 익명을 당연시하고, 대필자는 대필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는 정치인들의 대필 자서전 출판 기념회가 상례처럼 되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8월 한 국회의원의 금고에서 발견된 뭉칫돈 수천만 원이 ‘출판기념회 축하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상에 등장하면서 그간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한 출판사 간부에 의하면 “정치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책 제작과 출판기념회까지 모두 5,000만 원을 투자하고 최소 1억~2억 원의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대필작가의 역할이 부각된다. 정치인들의 글을 대필해주는 A급 작가는 3,000만 원을 받고, 일반적으로는 1,000만 원 안팎의 돈을 받는다고 한다. 어차피 출판기념회 행사 하루에 소진하는 책이라서 제작 부수도 500~1,000부 정도로 적고, 일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제작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일반인 사이로 파고든 대필 시장


  정치인들과 CEO, 연예인들에 국한됐던 대필 시장도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글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취업사이트 등의 게시판에는 카카오톡 아이디를 남겨둔 자소서 대필작가들이 가득하고,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사이트에는 직무수행계획서나 업무관련 대필작가들이 휴대전화번호나 메일을 남겨놓고 있다. 최근 크게 확산된 ‘재능마켓’을 플랫폼 삼아 대필 서비스를 판매하기도 한다. 심지어 ‘손글씨’도 돈이 된다. 각종 사이트에는 작가들이 필체 샘플까지 올려두고 영업을 펼치고 있다.


  이런 작가들 대부분은 문예창작과나 어문계열, 신문방송학 등을 전공했거나 논술교사, 객원기자 등 글쓰기 경력을 지녔다. 신춘문예에 도전하다가 대필작가를 시작한 사람도 있고, 시나리오 작업 등을 하다가 짬을 내서 대필 알바에 뛰어든 사람도 있다. 


  특히나 가을은 각종 기업 공채와 대입 수시모집 등이 맞물린 대필 시장의 ‘대목’이다.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자 2010년 무렵부터 활발해진 대입 자기소개서 대필은 취업용보다 비싼 값에 거래된다. 요즘은 대입관련 전문 컨설팅 업체도 등장해 ‘대입 자기소개서’부터 ‘입시 전략’, ‘면접 전략’까지 지도한다고 한다. 이 같은 업체들은 최근 각 대학에서 도입되고 있는 ‘표절 검사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도록 써준다는 점을 내세우며 고객을 모으고 있다. 한 관계자는 “학벌만능주의 사회에서 대입 자기소개서를 의뢰하는 학부모들이 가장 절박한 사람들이다. 비용 외의 웃돈을 얹어주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들도 단골손님이다. 지난달 취업 포털 인크루트와 공채의 신이 함께 구직자 4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7.3%가 ‘대필 의뢰를 생각해봤다’고 답했다. 4.1%는 실제 대필을 받았는데, ‘서류전형에서 계속 떨어져서(55.6%)’, ‘서류전형에서 떨어질까 불안해서(33.3%)’ 대필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 서류전형은 취업준비생들에겐 ‘악몽’이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지난 14일 구직자 117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구직자들은 올 하반기 평균 15차례 지원해 2.1차례밖에 서류전형을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 교통법규 위반 등에 대한 경찰 단속이 심해지면서 법정 제출용 서류도 ‘짭짤한’ 벌이가 됐다. 법률기관 제출용 ‘반성문’의 경우 벌금의 감경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근 찾는 이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판단 여부, 처벌 규정 모호


  취업이나 대입 과정에서 벌어지는 대필 행위에는 피해자가 생긴다.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에 전문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죄를 물을 근거는 불충분하다. 우선 자기소개서 대필은 입시·채용 업무를 방해했다는 점에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력 등의 콘텐츠를 전문 작가에게 제공해 글쓰기 ‘기술’만 샀을 경우 판단이 애매해진다. 한 판사는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작성된 글이 내용상 허위가 아닐 경우 윤문이나 첨삭의 기준이 모호해진다”며 “실제로 처벌이 힘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에 제출하는 법률문서 대리권은 원칙적으로 변호사·법무사에게만 있기 때문에 법원에 제출하는 반성문, 탄원서 등을 일반인이 대가를 받고 써주면 변호사법 위반에 해당할 여지도 있다. 다만 ‘대필’을 가려낼 실질적인 장치가 없다. 대학교육협의회는 지원 서류를 비교해 동일 단어 및 문장의 반복 빈도, 배열 등을 검증하는 유사도 검색 시스템으로 자기소개서를 검증한다. 그러나 정확도가 높지 않아 때로는 학생이 직접 작성한 자기소개서가 대필 자기소개서로 의심받는 경우도 생긴다.


  기업들도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필사적으로 자기소개서를 검증하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 불필요하기 때문에 대필을 잡아낼 방법은 없는 셈”이라며 “자신의 콘텐츠로 승부하지 않은 지원자들은 면접에서 걸러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글쓰기 교육의 부재와 심화되는 글쓰기 평가 사이의 부조화 탓에 대필이 성행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지금의 학생들은 수능 중심 입시제도 때문에 초등학교 이후로는 글쓰기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입이 닥쳐서야 ‘논술’과 ‘자기소개서’라는 글의 장벽을 마주하곤 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정성을 위협하는 대필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전문가는 “교육과정 개선에서부터 교원 양성까지 글쓰기 교육에 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다른 역량과는 달리 단시간에 개선하기 힘든 분야라는 점은 교육과정 자체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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