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人 - 발견 III] 발견이 가져온 예술에서의 의미
[로그人 - 발견 III] 발견이 가져온 예술에서의 의미
  • 방성호 기자
  • 승인 2014.10.2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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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또는 ‘우연’으로 탄생한 새로운 창조
[이슈메이커=방성호 기자]

[로그人 - 발견 III] 객관화의 발견




발견이 가져온 예술에서의 의미


‘계산’ 또는 ‘우연’으로 탄생한 새로운 창조




‘발견으로서의 기법’은 1948년 마크 쇼러가 「허드슨 리뷰」에 발표했던 비평문의 제목이다. 이 글은 영·미 비평의 발전에 중요한 한 단계를 이루었는데, 결국 기법만이 예술을 객관화할 수 있다는 하나의 명제로 축약될 수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작가일수록 재료를 형상화하려는 문제가 더욱 커다란 압력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즉 예술은 기법에 의해서만 내용을 획득하며 그 본질적 측면은 오직 기법에 의해서만 제한받는다고 할 수 있다.





재현할 수 없음을 재현하는 방법, 원근법


  인류역사에서 철학적 의미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인간의 존재론과 이어지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 중 공간은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적 선원근법이 발견되면서 평면회화에서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하는 새로운 길이 열렸고, 동양에서의 공간은 여백을 통한 무한한 사유의 공간이 재창조되는 독특한 감각이 연출되었다.


  원근법(Perspective), 르네상스의 위대한 발견이다. 이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작업으로, 원근법의 발견이 회화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1425년경에 완성된 프레스코화인 마사초의 「성삼위일체 (그림 1)」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사초의 이 작품은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을 통해 그려진 최초의 그림들 중 하나이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위치한 이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두 손으로 바치고 있는 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인물 사이에 그려진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발아래 좌우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제자 사도 요한이 그려져 있으며, 이 작품을 봉헌한 의뢰인 노부부가 그 아래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있다. 화면의 가장 아래에는 해골이 마치 죽음에 대한 경고, 혹은 삶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듯 관위에 누워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점은 작품이 도상학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의미보다 이 장면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연출되어 있는가에 있다.  




  이 작품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는 공간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마리아와 요한이 속해있는 공간과 의뢰인 노부부가 무릎 꿇고 있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장면이 연출되어 있는 공간은 르네상스 양식의 소예배당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건축적 요소들은 공간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이 공간을 평명이 아닌 깊이가 있는 공간으로 지각하도록 한다. 또한 한 점에서 모이는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는 각 인물들의 배치와 반원통모양의 천정을 분할하고 있는 가로세로의 교차하는 선들은 공간감을 더욱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이렇게 건축적 요소들과 인물들이 원근법적인 계산에 의해 배치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마치 벽면에 실제로 소예배당이 지어져 있고 그 곳에서 이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은 시각적 착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15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창안된 원근법은 2차원의 시각적 그림을 우리가 지각하며 살고 있는 복잡한 3차원의 세계로 확신시키는 수단을 제공한다. 선원근법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시점보다는 어떤 고정된 시점을 따르며 소실점으로 향하는 직선 투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지각되는 것보다 곡선적인 현실이 부정되는 것이다. 


  원근법은 2차원적인 평면에 3차원적인 공간의 깊이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재현 양식이다. 이것은 그림 그리는 방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세계를 보는 방식도 규정했다. 또한 입체적인 대상이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크기가 작아지는 현상과 우리가 기찻길이나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평행선이 무한히 멀어지며 마치 한 점으로 수렴되는 듯이 나타나는 현상을 기하학적 비례의 원리에 입각해 재현함으로 시각의 공간을 합리화했다. 원근법의 공간은 평행성이 수렴하는 공간이며, 기하학적으로 합리화된 수학적 공간이자, 이 합리화된 시각공간은 무한한 공간이다. 이 무한한 공간과 그 속에서 형상들의 배치를 조직하는 중심인 중심점, 즉 소실점은 바로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과 일치한다. 바로 이렇게 시각의 중심인 소실점과 시점이 일치됨으로써 그림의 관람자는 무한한 연속적 공간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원근법의 합리화된 시각공간은 동질적이고 무한한 연장으로서의 공간과도 부합하며, 이 시각공간의 소실점에 자신의 시점이 위치하는 자신의 사유와 의지에 따라 세계를 통제하려는 것과 같다. 동시에 소실점은 수의 질서에서의 ‘0’과 같다. 시각적 0으로서의 소실점은 이미지의 무한성을 창출하면서, 재현될 수 없는 점으로 그 자체가 시각의 한계를 나타낸다. 원근법의 주체는 기하학적인 시각 공간속의 한 점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소실점은 재현할 수 없는 ‘무’를 재현하는 부재(不在)이다.





새로운 의미와 형태의 창조, 토르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체 조각상이라고 하면 전신상을 그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제세되고 있는 인체 조각상들이 거의 대부분이 전신상이나 군상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토르소를 인체의 전신상을 기법연구로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인체의 일부인 토르소(Torso, 몸통)는 그 자체만으로도 조형적이며 완벽한 개체로서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토르소는 고대 인체조각 작품들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파손된 부분으로 발굴되어 우리에게 제시된 우연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흙속에서 캐낸 무나 고구마 등 식물의 뿌리와 구조의 상태가 흙속에서 전체의 한 부분으로 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그 나름대로 전체를 대신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감출 수 없는 생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만일 고대 인체조각이 파손된 대리석상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상태의 청동상으로 발굴된 것을 우리가 보아 왔다면 토르소의 개념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며 토르소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제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토르소는 고대조각에서 전신상이 훼손되어 머리나 팔, 다리가 없는 조각상 또는 조각가가 의도적으로 인체의 머리나 팔, 다리 등의 전부 또는 일부를 생략해 표현한 조각상이다. 토르소란 용어의 개념이 처음 소개된 것은 기원전 1세기말에 제작된 ‘헤라클레스상’이라고 추정되는 로마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된 벨베데레의 토르소(그림 2)에 대한 빙켈만의 설명을 통해서이다. 특히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이 벨베데레의 토르소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잘려나간 부위에 대한 복원을 의뢰한 교황에게 그는 ‘이것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조각’이라 감탄하며 복원작업을 고사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조각의 역사에서 인체의 머리와 팔, 다리 등의 전부 또는 일부가 생략된 동체만의 조각을 독립된 의미를 지닌 표현형식으로 인정하고 토르소라 부르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부터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조각가들은 고고학에서 발굴한 고대조각의 부분적인 인체조각상을 통해 새로운 조형세계를 경험했으며 토르소를 중심으로 인체를 보다 큰 단위로 조화롭게 구성하고 표현하는 것이 더 조형적이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각가들은 토르소, 즉 인체의 동체를 중심으로 볼 때 여성의 육체가 남성보다 아름다운 기하학적 형태인 달걀 형태와 타원 형태, 그리고 구형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보다는 여성을 주제로 한 토르소가 일반적이다. 조각가들이 여성의 토르소를 빌어 구현하는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우리에게 전신상과 다른 만족감을 주는 것은 그것들이 여성의 누드에 있어서 우리를 사로잡는 형태들의 단순화된 표현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토르소는 언어처럼 경험 내용을 되살리는 풍부한 연상 작용을 하므로 단일한 유추로서 어떤 표현형식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토르소에서 성(性)과 기하학적인 형태와의 결합에 바탕을 둔 논의와 그 표현을 어느 방향으로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토르소뿐만 아니라 누드의 개념이 우리의 기본적인 조형질서와 의미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누드와 토르소의 개념 및 본질은 조각가가 재현한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로 해석된다. 인체는 조각가들이 새로운 조형세계를 탐험하고 조형언어를 창안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계기 또는 그 이상의 무언가도 아니다.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 사상의 표현이며, 인체라는 자연적인 형체는 작가의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자연과 작가와 시대상과의 유기적인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인체조각의 역사에서 인체에 대한 인식과 표현 가능성을 확대해 변화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원인은 조각가들이 인체의 부분상인 토르소의 본질과 그 조형적 가치를 깨달은 것에 있다. 현대조각에서 조각가들이 토르소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화가들이 조각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토르소는 전신상의 부분들은 생략해 표현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전신상이 조각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 낼 수 있는 온전한 그릇인 것처럼 토르소는 그 자체로 완전한 그릇이자 독자적인 표현양식이다. 토르소는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생명력의 원천이며 마음과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정서적인 것이다. 현대의 조각가들이 감각보다 관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누드는 마음에 떠오른 최초의 관념이었으며, 토르소는 그 범위를 확장시켰다. 누드와 토르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형태를 창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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