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人-소통 III] 소통의 예술, 그 한계에 도전하다
[로그人-소통 III] 소통의 예술, 그 한계에 도전하다
  • 방성호 기자
  • 승인 2014.08.25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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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다중적 동시혁명
[이슈메이커=방성호 기자]

[로그人-소통 III] 혁명적 아방가르드, 플럭서스




소통의 예술, 그 한계에 도전하다


삶과 예술의 다중적 동시혁명



▲왼쪽부터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백남준




예술은 항상 제도적, 전통적 통념을 거부하며 소통해왔다. 소통은 곧 언어로 재현되어 우리에게 다가왔다. 1960년부터 1970년대에 걸쳐 미술이 가진 또 다른 소통의 방법을 찾고자 했던 국제적인 예술운동이 있었다. 바로 플럭서스(Fluxus)라는 전위적인 예술운동으로 핵심인물인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백남준을 통해 20세기 예술운동의 역사 속에서 혁명적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을 새기게 된 플럭서스의 총체적인 이해와 예술의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반구성주의 작곡가, 존 케이지


  존 케이지는 근대 유럽의 음악미학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인 ‘구성주의’, ‘결정론’ 등과 본격적으로 절연한 첫 번째 작곡가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논쟁들로 가득한 오늘날의 세계에 음악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유용한 영감을 제공해준다.


  근대적 작품을 벗어버리려 했던 존 케이지는 아무런 수정이나 처리 및 통제를 가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소리에 우리의 귀를 그냥 기울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1952년 독일의 현대음악제에서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4분 33초 (사진 1)」는 주어진 한 순간에 연주회가 열릴 수 있는 장소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들을 것을 강요한다. 이 작품에서 연주자는 연주가 이루어질 장소에 들어가서 4분 33초 동안 청중의 기대를 받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시 들어가 버린다.


  사람들은 무대 위로 걸어 들어오는 연주자를 보고 그가 어떤 연주를 할지에 대해 궁금해 하고, 기대한다. 하지만 연주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아무 일도 안한다. 처음 몇 십초 동안 사람들은 왜 연주를 하지 않을까하고 조금씩 귓속말을 상대에게 전하지만 연주를 하지 않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귓속말은 점차 중얼거림으로, 소란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소란이 이 작품이 의도하는 소리의 결과물일 수 있다.





  첫 연주 때에 이 작품은 이러게 일종의 스캔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이 작품이 재연될 때마다 사람들은 연주의 양상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번에는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리들을 주의 깊게, 그리고 진지하게 듣게 된다.


  당시만 해도 충격적이었던 이 작품의 의도는 청중이 곧 작곡가가 조직한 음들로 구성된 ‘작품’ 대신에 작곡가가 제안한 특정한 시간대에 청중들 자신의 주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소리에 대해 의식하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청중은 자기가 듣고 있는 것에 모종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이제 스스로 작곡가가 된다. 근대적이며 서구적인 의미, 즉 어떤 한 작곡가가 주어진 음들을 조작하고 통제해 그들에게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해 만들어낸 구성주의적 작품의 개념과 이러한 작품을 작곡하는 정해진 작곡가라는 개념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작품을 대면했던 청중’ 대신 ‘작곡가의 반열에 오른 청중’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


  케이지의 이 작품과 함께 음악은 근대적인, 더 나아가 문명이 제공하던 틀을 벗어던지고 있다. 자연에 반하는 인위적 노력의 산물인 예술로서의 음악과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을 케이지는 부정하고 있다. 사실상 전자보다 후자에 더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며, 소통의 대상이 곧 소통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라. 그대 주변의 모든 것이 음악일지어니. 귀 기울이는 자가 곧 작곡가이다. - 존 케이지 -」 





행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


  카리스마 있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요제프 보이스는 지난 40년 동안 지속적으로 미술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쳐왔다. 의례적인 공공 퍼포먼스 시리즈로 유명해진 그는 미술의 치유력과 인간 창조력의 구제 능력을 끊임없이 옹호했다. 보이스는 행동, 드로잉, 조각, 환경 작품, 판화 그리고 열정적인 가르침과 강연을 통해, 미술은 낡은 사회 구조의 억압적인 면을 제거할 수 있는 진화적이고 혁신적인 유일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미술에 관해 유토피아적인 시각을 지닌 최후의 미술가일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성취들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요제프 보이스는 국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플럭서스 운동에 가담한 후, 그는 독특한 퍼포먼스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사진 2)」이라는 퍼포먼스에서 보이스는 샤머니즘의 주술사 같은 역할을 연기했다. 그는 머리에 벌꿀과 금박을 뒤집어쓰고 발에는 쇠로 창을 댄 신발을 신은 채, 품에 안고 있는 죽은 산토끼에게 미술관 안에 걸려 있는 작품들에 대해 조용히 설명하며 세 시간가량을 보냈다. 그는 지방, 펠트, 꿀, 쇠, 구리 같은 특이한 재료들을 작품에 자주 사용했는데, 각각의 물질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예를 들어 꿀은 꿀벌 공동체의 달콤한 생산물인데, 독일의 사상가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 꿀벌 공동체를 따뜻한 인류애로 가득한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전형으로 보았다.




  요제프 보이스는 미술과 정치와의 관계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정치와 사회 문제를 항상 미술과 연관시켰다. 수많은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 조각과 드로잉을 통해 그는 정치적 상황과 사회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모두가 미술가다’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졌듯이, 그는 전체 사회를 거대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의 창조력을 옹호했다. 즉 그는 누구든 모든 직업에서 잠재적 창조자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모든 삶의 형태를 예술 작업의 일부로 생각했다. 


  이 확장된 미술 개념은 인간의 활동 규범을 체계화하는 계급 제도와 관습적인 틀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은 시공간을 통해 거대한 하나의 프로젝트, 바로 ‘사회적 조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동적인 그의 예술관은 개념미술, 행위 예술, 환경 미술을 비롯하여 독일 신표현주의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보이스는 자신의 생각을 지치지 않고 주장했다. 그는 열성적인 교사로서, 전 세계를 돌며 강연을 하고 정치적 기구를 설립했다. 1972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자신이 맡았던 반의 입학 요건을 폐지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사람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성을 가지고 작품 활동과 설명을 했던 보이스의 유토피아적인 미술관을 다소 귀찮고 곤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제프 보이스는 국제적으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72년 뉴욕에서 열렸던 대규모의 회고전이 계기가 되었다. 보이스가 주술사 혹은 사기꾼이건 아니면 영웅적인 선지자 또는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이건 간에, 그는 미술의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던 인물이었다.


「미술 작품의 조형 과정은 사회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은유이다. - 요제프 보이스 -」





탈목적론적 예술가 백남준


  백남준에게 있어 예술은 다른 무엇보다도 작업과정과 최종결과를 연결 짓는 목적론에서 벗어나 미지의 것, 새로운 것에 도달하는 방법이자 이념이었다. 그가 탈목적론을 위한 치열한 훈련은 바로 기술에 대항하는 기술로서의 예술이다.


  백남준은 자신의 시대가 1920년대와는 달리 전기화(electrification)를 넘어 전자화(electrofication)의 상황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전자적 상황 속에 있다고 보면서 그 스스로 전자를 깊이 연구하고 또 전자에 학계와 예술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위성들을 하늘을 통과하는 희미한 주파로 이해했다. 위성공간을 가로지르는 음양 주파들의 만남은 마치 견우와 직녀의 만남처럼 오래된 것이지만, 전자적 소통은 그 오래된 만남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백남준의 태도는 어떤 모호함도 없었다. 또한 그는 기술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무조건 환영하는 일면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면서도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통(communication) 개념의 혁신이다. 우리는 백남준에게서 생산과 노동, 그리고 예술의 비물질화가 강력한 경향으로 부상하는 시대에 소통의 개념을 혁신할 중요한 사상적, 미학적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백남준은 존재를 대상화하려는 시각보다 존재들의 실제적·가상실효적 차원에서의 공통적 관계의 구축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의 모든 예술작업(사진 3)은 몸, 행위, 빛, 전자 들을 통해 존재들 사이의 영원성의 관계의 기능조건을 보여주려 시도한다. 기술과 매체들은 이를 위해 사용되는 예술수단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백남준의 예술사적 기여가 비디오 예술의 창시에 있다는 상투화된 예술사적 평가를 접하게 된다. 이러한 평가는 매체미학이라는 관점에서 그에게 접근하도록 만든다. 얼핏 보면 이것은 플럭서스와 백남준의 예술미학이 오늘날 대중문화의 원천이자, 그 발전과정에 대해 우울하고 비판적이라는 평가를 내린 프랑스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와는 달리 백남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다른 관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은 기술과 매체를 중심으로 백남준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가치평가상의 차이를 넘어 본질적으로는 공통적이다. 컴퓨터와 디지털에 의해 백남준의 비디오가 역사적 과거로 되어가고 있는 지금에 이러한 평가는 그를 과거화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예술매체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숙련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이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에게서 매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그의 예술개념의 핵심에 매체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이 이상적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론적 방법이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그의 예술은 미지의 것을 추구하고 미지의 만남을 실험하는 탈목적론적 엑스터시의 방법이다.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 백남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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