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人-소통 I] 유선에서 무선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소통
[로그人-소통 I] 유선에서 무선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소통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4.08.25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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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통신의 발달
[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로그人 I - 소통(Communication)] 통신, 그 소통의 역사



유선에서 무선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소통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통신의 발달





만일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개의 언어학자들은 인간만이 언어다운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새에게 날개가 있듯이, 물고기에게 지느러미가 있듯이, 인간에겐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 언어만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절대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발생과 함께 시작된 통신


  동물의 의사소통 행위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어류는 약 10~15, 조류는 15~25, 포유동물은 20~40가지의 신호를 쓴다고 한다. 인간의 언어는 적어도 수만에서 수십만 단어가 있으니 동물의 언어가 가진 단어 수는 우선 양적인 면에서도 인간의 그것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단지 ‘대면(對面)’ 관계에 그쳤다면 현재 인류의 문명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고 생활해나가면서 인간은 ‘언어’를 좀 더 먼 곳까지 전달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멀리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타인을 통하거나 빛, 연기, 소리 등의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서부극에 나오는 인디언의 횃불 신호 혹은 아프리카 토인의 탐탐(길쭉한 북)이 그 한 예이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던 와중에 탄생한 ‘문자’는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이끈다. 문자를 통해 인류는 멀리 떨어진 이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은 뒤의 후대에도 말과 지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가 발명됨에 따라 통신은 발전되어 석반, 금속판, 목판, 동물의 가죽에 문자를 조각하여 그 내용을 전하게 되었다. 조직적인 통신제도가 역사적으로 등장한 것은 페르시아 시대 키루스왕에서 다리우스왕에 이르는 3대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위해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한 역제(驛制)다. 일정거리마다 사람이나 말을 두어 언어를 전달하도록 했던 이 제도는 이후 로마 제국에 계승되어 퍼져나간다. 하지만 그 속도는 1시간당 고작 15km에 불과했다. 그 후 12세기 유럽의 주요지에 소재한 대학의 유학생과 그들의 고향인 유럽의 각지를 연결하기 위한 서간의 전달, 남부 독일의 슈바벤을 중심으로 한 정육업자의 통신, 1484년 스트라스부르를 중심으로 생겨난 은문갑을 사용한 통신 등이 존재했다.


▲클로드 샤프가 고안한 세마포어는 현재 군부대의 수기신호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1790년 프랑스 혁명이 한창 중일 때에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는 되도록 단시간 내에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것은 탑의 지붕에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에 수평의 가로 막대를 붙이고 그 양쪽 끝에다 가동성 있는 짧은 막대를 단 것으로 탑의 내부에서 로프로 그 막대의 각도를 바꿀 수 있었다. 세마포어(Semaphore)라 불리던 이 장치는 현대적인 통신의 시초가 된다. 이 탑은 10km 내지 12km마다 설치되어 병사가 망원경으로 이웃 탑의 막대 모양을 보고 차례로 같은 부호를 다음 탑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1794년 파리와 릴 간에 설치된 세마포어의 처음 메시지는 프랑스군의 케즈노 탈환을 정부에 알리는 것이었다.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의 대군에 포위된 프랑스가 끈질기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군에게 세마포어를 이용한 정보의 전달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타이타닉 호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전신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의사를 소통하는 방식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미국의 화가였던 모스(Samuel Morse)는 프랑스 여행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 대서양 정기 여객선에 때마침 함께 타고 있던 학자로부터 전기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어떤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는 뉴욕에 돌아오자 곧바로 베일(Alfred Vail)과 협력, 점과 봉선의 배열로 문자와 숫자를 표시하고 이것을 송신해서 전자석으로 펜을 움직여 기록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것이 모스 부호이다. 1845년 1월에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전신회선을 만들어서 최초의 모스 부호 실험을 했다. 이때 송신된 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What hath God Wrought)”이었다. 이 모스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통신의 역사는 비로소 전기통신의 시대로 들어섰다.


  무선통신의 개념은 1893년 N.테슬라가 발명했다. 이후 1895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M.마르코니(Guglielmo M. Marconi)가 독일의 H.헤르츠가 발견한 전자기파와 프랑스의 E.브랑리가 발명한 검파기에 자기가 고안한 안테나와 어스를 결합하여 전파에 의한 통신방법을 사용해 무선통신에 성공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 실용성에 주목한 각국은 앞을 다투어 무선 통신에 대한 연구와 실용화에 열을 올렸다. 특히 영국은 1896년에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를 설치해 해상의 선박국과 육상국 사이 또는 선박국 상호 간의 교신을 시작했다. 장거리 무선 통신은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영국이 본국과 곳곳의 식민지를 결합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무선 전신의 가치가 날로 치솟자 1900년경에는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통신 집단이 출현했고, 그들은 수신기의 성능과 안테나의 특성을 개량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특히 1912년에 발생한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가 무선전신을 통해 전 세계에 전파되는 것을 계기로 무선전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급속히 확산됐다.



▲무선통신의 아버지 M.마르코니




농아교사가 만든 ‘감정을 전달하는 기계’


  전화는 전신보다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화는 사용자들 사이의 직접적인 통신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까지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벨(Alexander G. Bell)은 1876년 2월 14일, 그레이(Elisha Gray)보다 2시간 빨리 특허를 제출했다. 그 덕분에 그레이는 후대의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전문 발명가였던 그레이는 상업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전화에 집중하지 않았던 반면, 농아학교 선생으로서 인간의 목소리에 관심이 많았던 벨은 전화의 개발에 모든 정열을 바쳤던 것이다. 벨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876년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전화를 선보인 후 벨 전화사(Bell Telephone Company)를 설립했고, 전화 기기를 제작하는 기업들에게 자신의 특허를 대여하는 한편 특허를 침해한 기업을 고소하는 방식으로 전화 산업을 급속히 석권해 갔다. 벨 전화사는 1885년에 AT&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로 확대·개편됐다.


  AT&T를 비롯한 초기의 전화 회사들은 전화를 전신과 마찬가지로 급한 용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전화가 사무용이 아닌 사교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고 1920년대까지 가정집을 주요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산층 여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친구나 친지에게 안부를 전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전화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화의 다른 용도는 전화 시스템의 변화에도 반영됐다. 처음에는 교환수가 플러그를 써서 전화선을 수동으로 연결시켜 주었지만 교환수가 전화를 통한 대화를 엿듣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자 자동 다이얼에 의한 전화 시스템이 정착됐던 것이다.





전파, 지구를 하나로 잇다


  전화가 개인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다면 라디오는 특정한 사건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체험할 수 있게 했다. 1918년에 암스트롱(Edwin H. Armstrong)은 수신기, 튜너, 증폭기를 하나의 기기에 집적시킨 라디오를 개발했고 웨스팅하우스는 1920년에 암스트롱의 특허를 매입했다. 1920년 11월 2일에 웨스팅하우스는 KDKA 방송국을 설립해 최초의 상업방송을 시작했는데 당시의 프로그램은 미국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를 중개하는 것이었다. 하딩이 제2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소식이 다음 날 아침의 신문이 배달되기도 전에 전달되자 미국 국민들은 라디오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라디오 방송은 급속히 성장해 1924년에 이르면 미국의 곳곳에 500개에 가까운 상업 방송국이 설립됐다. 1926년에는 미국 전역을 포괄하는 방송국인 NBC가 설립됐으며 1928년에는 주파수를 배정하고 관리하는 연방라디오위원회가 발족됐다.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라디오가 통신 수단의 최종적인 형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텔레비전이 개발됨으로써 무색해졌다. 1925년에 영국의 베어드(John L. Baird)가 ‘라디오비전’이라는 기계식 텔레비전을 개발한 후 영국방송공사(BBC)는 베어드의 장치로 방송 실험을 진행했다. 전자식 텔레비전은 1927년에 판즈워스(Philo T. Farnsworth)가 송신기와 수신기를 발명함으로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자식 텔레비전 개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기업은 미국라디오방송공사(Radio Corporation of America, RCA)였다. RCA는 1930년에 러시아 출신 기술자인 즈보리킨(Vladimir K. Zworykin)을 고용했고 즈보리킨은 10년에 걸쳐 감광성이 뛰어난 카메라 튜브를 제작하는 데 전념했다. RCA는 1938년에 텔레비전 사업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지만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제한을 받았다. 


  텔레비전 사업은 194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성장해 미국의 경우에 1946년에는 8,000대에 불과했던 텔레비전이 1960년에는 4,570만 대로 증가했다. 1965년에 통신위성이 발사된 이후에는 채널의 확장에 대한 기술적 제약이 제거됨으로써 수많은 케이블 채널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1989년, CERN(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연구원인 영국의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의 개념을 제시하며 현재의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소통의 창구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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