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人-도전 II] ‘운명의 산’에서 마주한 절대고독, 살아있는 전설을 만들다
[로그人-도전 II] ‘운명의 산’에서 마주한 절대고독, 살아있는 전설을 만들다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7.25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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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절망을 극복한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
[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로그人-도전 II] 자연에의 도전



‘운명의 산’에서 마주한 절대고독, 살아있는 전설을 만들다


불안과 절망을 극복한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




한 산악인이 15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곳은 수많은 산악인의 목숨을 앗아간 낭가파르바트였다. 그리고 오직 피켈과 자일만으로 단독 등반에 성공하며 세계 등반계에 새로운 역사가 쓰여 진다. 이후 이 산악인은 1986년 10월 16일 로체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 미터 급 14좌 완등이라는 신화를 이룩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등반가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바로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이다.





무산소 등정, 단독 등반…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


  라인홀트 메스너는 무산소 등정, 단독 등반, 알파인 스타일, 신 루트 개척 등 늘 새로운 도전과 방식으로 산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쇼의 명수’라는 혹평하기도 했지만, ‘세기의 철인’, ‘최고의 알피니스트’, ‘알파인 등반의 개척자’ 등 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등반가이자 개척가로 그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1978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한 이후 또 하나의 신기록인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이라는 세기의 도전을 보여주었고, 이후 1986년 10월 16일 로체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 미터 급 14좌 완등이라는 신화를 이룩한다. 무산소 등정, 단독 등반, 알파인 스타일, 신 루트 개척 등 늘 새로운 도전과 극한에의 여정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1978년 에베레스트 등반 당시의 라인홀트 메스너(왼쪽)



  이 뿐만이 아니다. 등반 이후 뛰어난 글 솜씨로 내면의 고백을 담아낸 그의 저서는 산악인 이상의 존경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세 번이나 산악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언론에서는 “극한에 도전하는 일반적인 등반기를 넘어,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순간 절대 고독 앞에서 겸허해지는 내면 고백의 정수”라고 그의 저술을 극찬하고 있다. “생사를 건 도전, 의지력의 발휘, 정열적인 행동. 그 어느 것으로 보아도 이 단독 등반은 유례가 없는 하나의 척도를 이루었다”라는 독일의 유력 시사 주간지 《STERN》의 대서특필처럼,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시대 최고의 등반가이자 개척가이다. 이처럼 그는 20세기 후반 알피니즘의 무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978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과 낭가파르바트를 단독으로 등반한 일이다.


  낭가파르바트는 지구상에서 아홉 번째로 높은 고봉이지만 표고로 치면 8,000m 급 14봉 중에서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낭가파르바트만큼 집요하게 도전을 받고 비극을 연출한 곳도 없다. 이러한 낭가파르바트를 메스너는 1978년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 3개월 후에 단독으로 등반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세계 최고봉을 인공적인 산소의 도움 없이 오를 수 있는가 하는 논쟁은 1920년대 에베레스트 도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났다. 반세기에 걸친 이 논쟁은 1978년 5월 8일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의 무산소 등반으로 종식됐다. 이날의 무산소 등정은 1953년 5월 29일에 있었던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등정처럼 인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고 잊혀 지지 않을 하나의 사건이었다.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 이전, 라이홀트 메스너의 존재가 세계 등산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70년의 일이다. 그는 스물다섯 살 때인 1970년, 8,126m 세계 9위의 고봉인 낭가파르바트에 도전했는데, 그 때도 처음으로 산소 기구 없이 8,000m가 넘는 봉에 올라 산악인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동생 귄터와 함께 형제끼리 정상을 정복한 첫 기록도 갖고 있다. 메스너가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겠다고 공언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당시 에베레스트 원정을 계획하고 있던 우리 한국 원정대는 산소 기구를 사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라인홀트 메스너가 우리나라 원정대의 뒤를 이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고독의 빙벽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앞서 얘기한대로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0년, 동생 귄터와 표고차 4500m의 루팔 벽을 넘어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하산하던 중 눈사태가 일어난다. 그것은 귄터를 덮쳤고 메스너는 동생을 잃었다는 슬픔과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탈진 상태로 산을 내려오게 된다. 게다가 슬픔에 빠져 괴로워하던 그를 위로해주던 아내는 1977년 그의 곁을 떠난다. 동생의 죽음과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은 메스너를 절대 고독과 맞닥뜨리게 하고, 갑작스럽게 마주한 이 감정에 그는 불안과 고독 속에서 절망하게 된다.


  가슴 속에 똬리를 튼 절대적인 고독과 불안, 절망은 그를 낭가파르바트로 이끌었다. 명예욕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존재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다시 1978년, 낭가파르바트로 향한다. 


  지진으로 인해 루트가 무너지고, 환각과 환시가 끊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메스너는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향해 묵묵히 올라간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기억과의 화해이자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이며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있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8월 9일 16시, 드디어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에 성공하고, 그를 괴롭히던 고독은 두려움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는 힘으로 변화한다. 절대 고독의 경지, 이처럼 의도한 고독을 라인홀트 메스너는 ‘흰 고독’이라 불렀다. ‘흰 고독’은 고립과는 다른, 자기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의도된 고독이다.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히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 라인홀트 메스너, 『검은 고독 흰 고독』 중에서





끝없는 정진과 깊은 사유, 구도자의 면모 보여


  대한산악연맹 회장과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검은 고독 흰 고독』을 비롯한 라인홀트 메스너의 저작을 여러 권 번역했던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은 “대체로 뛰어난 등산가가 그러하지만 메스너에게는 구도자 같은 면이 있다. 그는 끝없는 정진, 가혹한 자기단련으로 세계 최고의 등반가,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한다. 메스너는 등산에 대한 생각 자체부터 특이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답습되어 온 등산 형식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많은 인원과 장비와 자금이 투입되는 원정 활동을 반대했다. 이러한 자기만의 등산관을 입증이나 하듯 메스너는 1975년 페터 하벨러와 함께 히든 피크에 올랐다. 8000m 급봉을 단 둘이서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앞으로 있을 단독 등반을 위한 초석이었다. 그는 1972년 마나슬루 원정 때 고소캠프에서 혼자 정상까지 오른 일이 있었지만 이것 역시 그에게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메스너는 등산계의 역사적 과제들을 해결하고자 직접 산에 오르고 어려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을 바탕으로 『에베레스트(Everest Solo)』,『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Alleingang Nanga Parbat)』 등을 썼다. 





등반은 정복이 아닌 자신을 찾는 여정


  라이홀트 메스너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개 고봉을 무산소로 완등했다. 통상 이게 정점이다. 하지만 그는 혹한의 눈바람 속에서 남극을 걸었고, 스스로 ‘내 안의 사막’이라고 부르건 고비사막도 횡단했다. 소위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문화였다.


  1944년생인 메스너는 이제 우리 나이로 칠순을 넘긴 나이다. 당연히 지난날처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역사적 등반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약하며 많은 작품을 내놓는 등 여전히 열정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부터 이탈리아 남부 티롤의 녹색당원으로 활동하며 환경보호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2003년부터는 산악박물관 프로젝트에 착수해 2006년 산악지역의 형성과정을 설명하고, 히말라야에 대한 자료를 모아놓은 메스너 마운틴 뮤지엄(MMM)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그는 국제산악정상회의와 알피니즘에 대한 콘퍼런스를 여러 차례 개최하기도 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세계 등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고 그 역사를 새로 쓰는 등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알피니스트가 된 데에는 남들이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도전 정신과 체험의 세계가 있었다. 그의 저서들이 단순히 한 유명 산악인의 등반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좌절과 집념, 그리고 성공과 초월을 다룬 휴먼스토리이자 철학서로 다가오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내 자신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내 일을 후세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단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렇게 여기 앉아 있는 동안 나는 과연 이 산을 혼자서 오를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혼자서 밑에서부터 저 높은 정상까지.” - 라인홀트 메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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