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 인류를 우주로, Space Race
[History Culture I] 인류를 우주로, Space Race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4.06.2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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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험을 낳다
[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History Culture I] 냉전이 만들어낸 우주 경쟁



인류를 우주로, Space Race

두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험을 낳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강 체제로 재편됐다. 유럽과 중앙아시아, 동남아는 물론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와 심지어 미국 턱밑의 중앙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사회주의의 수장 소련의 첨예한 대립은 세계지도를 둘로 나누었다. 하지만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위협하는 긴장상태가 지속됐을 뿐,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난 세계대전 말미 그 위력을 과시했던 핵무기에 대한 공포, ‘공멸(共滅)’에 대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국력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전쟁 ‘우주개발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도구 ‘로켓’, 우주 개발의 도구로

  우주개발 전쟁의 서막을 열고 주도했던 국가는 소련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가 있었다. 코롤료프는 원래 항공기 설계자로서 교육받았으나, 개발과 통합, 조직과 전략 계획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다. 폭격기 설계에 종사하던 그는 항공기에 제트 추진력을 사용하는 일을 구상해 1931년에는 제트 추진 연구 그룹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3년 소련 최초로 액체 연료를 이용하는 로켓 엔진 개발에 성공해 새롭게 신설된 제트 추진력 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하던 그는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국가 태업과 자원 낭비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진다. 혹독한 환경과 궂은 노동 속에 코롤료프는 모든 치아를 잃고, 턱 골절, 심장병, 괴혈병에 걸리는 등 건강이 크게 악화된다. 운 좋게도 그는 살아남았지만 로켓 기술자들에 대한 정치적 숙청은 소련의 로켓 개발이 나치 독일에 뒤처지는 원인이 되었다.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느낀 수뇌부의 결정에 따라 모스크바에 있는 강제 수용소 내의 특별 연구소에 옮겨진 그는 이곳에서 다시 항공기 개발에 종사하게 된다. 전쟁 말미인 1944년 사면된 코롤료프는 1945년에는 지위를 회복하고 다시금 로켓 개발의 수장을 맡게 된다. 종전이 다가오며 미국과 소련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인 ‘기술 쟁탈전’에 돌입한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독일의 뛰어난 무기 기술에 대한 정보와 연구 자료를 우선 확보하는 것이 미래의 가상 적국으로 간주된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가장 중대한 과제였던 것이다. 소련군과 함께 독일 페네뮌데 연구소로 향한 코롤료프는 전쟁말기 영국을 위협한 나치 독일의 가장 무서운 무기였던 ‘V-2 로켓’의 정보 수집을 실시한다. 전후 아이젠하워 연합군 사령관이 “V-2로켓이 6개월만 먼저 나왔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 이 로켓은 수직 발사되어 우주공간에 도달한 뒤 목표지점에 수직 낙하하는 방식으로 현대 로켓의 원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V-2 로켓의 설계도와 함께 독일인 기술자 5,000여 명을 국내로 이송한 소련은 본격적인 로켓 개발에 착수한다. 소련은 이 기술을 바탕으로 R-1, R-2 로켓을 잇따라 성공시키고 1953년에는 사정거리 1,200km 의 R-5 로켓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57년 사정거리 7,000km의 R-7 로켓을 개발하며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

  우주개발은 처음에는 소련이 개발한 장거리 로켓의 능력을 과시하는 무대로서 준비되었다. 코롤료프는 1957년 10월 4일, R-7 로켓을 사용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다. 궤도에 올라 지구를 돌며 스푸트니크가 보내온 신호는 미국 전역에서 감지되며 미국인들을 ‘스푸트니크 쇼크’로 불리는 전쟁의 공포에 몰아넣었다. 발사버튼 하나로 미국 본토에 직접 타격이 가능한 거대살상무기의 존재는 전쟁 발발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이 막대한 개발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로켓개발에 지지부진한 사이 소련은 러시아 혁명 40주년 기념일인 1957년 11월 7일을 목전에 둔 11월 4일,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실은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한다. 비록 예정보다 짧은 몇 시간동안만 생존했으나 인간의 우주방문에 대한 가능성을 엿봄과 동시에 그간 소련의 과학기술을 무시했던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 커다란 충격이 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61년 4월 12일, 비로소 코롤료프에 의해 인간 최초의 우주비행이 실현된다. 세계 최초, 아니 '인류 최초로 우주로 간 인간'의 명예를 얻게 된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을 실은 보스토크 1호는 1시간 29분 동안 지구 상공을 일주하고 무사 귀환에 성공한다. 유리 가가린의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는 말은 전 세계적으로 큰 울림을 전달했고 결과적으로 소련과 코롤료프의 위상을 드높이게 된다.

  이후 코롤료프는 유인 달 여행을 목표로 대형 우주선 소유즈(Soyuz)와 대형 로켓 N-1의 개발을 진행시키지만, 1966년 암 수술 중에 사망하게 된다. 코롤료프는 미사일 및 우주 개발 관련 업적으로 레닌 훈장도 수여받았지만, 보안상의 문제로 우주 개발 기술자의 신원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는 소련 당국의 방침에 따라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미국의 개발자 폰 브라운이 코롤료프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그의 사후였다. 



사상 최고의 과학기술발전 경쟁

  소련이 독일의 기술자들과 연구자료를 흡수하며 로켓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미국은 자체적인 공군력과 과학 기술력을 맹신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러했듯 폭격기를 통해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으며 독일의 V-2와 같은 장거리 로켓은 미국 내 기술자들이 개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컴퓨터와 같은 기술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이끄는 기술을 으레 ‘전쟁’을 통해 개발된다. 독일이 유럽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필요에 의해 개발했던 수많은 무기기술들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여타 국가에 비해 10년 이상 앞선 것들이었다. 영국의 해상봉쇄를 위해 개발한 잠수함 기술, 도시 폭격을 위한 로켓, 전쟁 초 전격전을 위한 전차기술 등 전쟁을 통해 일궈낸 독일의 기술력은 독일 패망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구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독일 출신의 로켓 과학자로서 나치 독일 하에서 V시리즈 로켓을 개발한 인물이다. 본래 무기개발보다 우주 진출에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폰 브라운은 독일 로켓 연구소의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를 만나며 액체 연료 로켓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 준비를 가속화하던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그의 연구는 전쟁무기로서 사용된다. 히틀러가 지원한 페네뮌데 연구소에서 그는 당시 최고의 로켓인 V-2 로켓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독일 패망 후 미군에 항복한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은 뉴멕시코의 미군 기지와 계약을 체결한다. 전범으로서의 죄를 사면하는 대신 로켓 개발에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계약이었다. 소련이 페네뮌데 연구소에서 V-2의 연구자료를 가져간 대신 미국은 V-2의 실질적인 개발자 폰 브라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초기 미국 로켓개발 계획에서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의 나치 활동 이력이 번번히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급변하게 된 것은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궤도에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하면서부터였다. 195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폰 브라운은 1958년 창설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마셜 우주 비행센터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NASA는 1958년 12월 17일, 5년 내에 6명의 우주인을 지구궤도에 비행시키겠다는 머큐리 계획을 발표한다. 폰 브라운에 의해 주도된 우주 개발 계획은 미국의 로켓 기술을 최고로 끌어올린다. V-2를 개량해 중거리 탄도탄인 주피터 G를 완성했으며, 1959년에는 미국 최초의 우주 로켓 파이어니어 4호의 발사에 성공한다. 하지만 희생과 강요 위에서 단결력을 발휘하며 성장하던 소련의 우주 개발기술과는 달리 언론의 참견과 막대한 로켓 개발 비용은 미국의 우주진출을 번번히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다.

  뒤쳐진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미국이 고군분투하는 사이 1961년 4월 소련이 먼저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명예를 빼앗긴 미국은 같은 해 5월 25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앞으로 10년 안에 인류를 달에 착륙시키겠다”라는 발언을 통해 다시금 우주개발에 탄력을 받게 된다. 인류가 지구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보기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꿈꿔왔던 모험, ‘달’로의 여행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절치부심한 미국은 우주개발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하며 본격적인 경쟁에 불을 붙인다. 머큐리 계획에 의해 유인 궤도비행에 성공한 미국은 ‘제미니’라 명명한 계획을 통해 우주에서의 장시간 유영과 랑데부, 도킹 기술에 집중적인 연구를 수행한다. 본격적인 우주비행을 위해서는 안전한 우주선 캡슐로부터 나와 혹독한 우주환경에 적응하며 우주선을 수리하거나 우주작업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주선 밖을 나와 선회하는 활동인 우주유영은 위험하지만 필히 해야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우주개발에서 한발 앞서 있던 소련은 1962년 최초의 실용 통신 위성과 1965년 최초의 우주 유영을 먼저 성공시키며 미국을 긴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우주 랑데부도 1962년 보스토크 3, 4호를 쏘아 올려 실험했다. 

  양국간의 불꽃 튀는 경쟁은 1965년 2월 소련의 루나 9호가 달에 처음 착륙하고, 뒤이어 미국의 서베이어호도 달에 착륙하는 등 점점 열기를 띄게 된다. ‘최초의 인류 달 착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은 새로운 우주개발 계획 ‘아폴로 계획’을 선언하며 달 착륙에의 윤곽을 잡아간다. 그리고 1966년 소련의 우주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던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가 암 수술 중 사망하게 되고, 이때부터 미국이 소련을 앞서나가게 된다. 정체된 소련을 앞지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미국은 우주개발 계획을 서두르게 되고, 결국 1967년 1월 비극적인 사고를 당한다. 아폴로 1호 발사에 앞서 실험을 하다가 화재가 발생해 탑승해 있던 우주인 3명이 모두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린 미국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1968년 12월 아폴로 8호를 달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듬해인 1969년 7월 20일 16시 18분. 달 표면에 인류의 발자국을 찍는 데 성공한다. 전 세계를 통해 생중계 된 이 역사적인 장면에서 아폴로 11호의 사령관 닐 암스트롱(Neil A. Armstrong)은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도약이다”라고 선언하며 달 탐사 경쟁에 미국이 종지부를 찍었음을 만천하에 밝혔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며 냉전의 긴장 완화가 진행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 의지는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두 나라 이외의 국가에서도 우주 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했고, 국가 예산의 상당부분을 사용해야 하는 우주개발에 언제까지고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폴로 11호 이후 대중의 관심도 점차 우주 개발에서 멀어져 갔다. 사람들의 무관심에 의해 우주 개발 경쟁의 동기는 희미해졌고 경쟁도 완만해져 아폴로 계획 후반부와 아폴로 응용 계획은 중지되었다. 미국 우주개발을 주도했던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이 취소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NASA를 떠나 사설 항공 우주회사의 기술 개발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신장암으로 1977년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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