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희재 이사장
[단독]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희재 이사장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6.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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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영원한 현역 작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만화에 담다


매체가 바뀌어도 중요한 것은 창작능력…나만의 만화 계속해 나갈 것





얼마 전 이희재는 네이버 웹툰이 마련한 ‘한국만화거장전’에 작품을 올렸다. ‘나 어릴적에’라는 자전적 웹툰이었다. 따뜻한 그림체와 담담한 필치에 사람들은 ‘역시 이희재다’, ‘이래서 거장이구나’라는 댓글들을 남겼다. 이희재는 사실 지금의 십대와 이십대에겐 다소 생소한 원로 만화가다. 하지만 이희재는 우리 만화의 사회비판성과 현실참여주의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만화가로 지금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현역 만화가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뿐만 아니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서도 작가는 사람 사는 세상의 아프기만 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며 우리 만화의 색다른 가치를 제시했다. 부천만화정보센터가 한국의 만화 전문가들에게 설문을 돌려 선정한 ‘오늘의 우리 만화가’, 만화평론가들이 선정한 해방 이후 최고의 우리 만화로 꼽혔던 ‘간판스타’의 작가 이희재를 만났다.




이희재는 명랑만화가 이정문과 시대극화의 대가 김종래의 문하를 거쳐 만화계에 입문했다. 그가 만화계에 발을 들여 놨던 시기에는 작품의 내용 측면에서 군사정권의 검열을 받았고 유통 쪽에서는 특정 기업의 독점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만화나 만화가를 대하는 대중의 인식도 ‘불량’ 했다. 모든 것이 만화가를 억압하는 구조였다. 그 역시 당대 만화계의 병폐로 꼽히는 대본소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생활의 곤궁 사이에서 지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선택했다. 만화가 환상의 세계만 쫓고 있을 때, 만화가 도처에서 유린당하고 있을 때 이희재는 ‘바른만화’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한 만화를 발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만화가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소중한 꿈을 향해 정진한 결과다. 






얼마 전 네이버 ‘한국만화거장전’을 통해 ‘나 어릴 적에’라는 자전적 웹툰을 선보이셨습니다. 웹툰이라는 형식이 다소 생소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매체의 차이일 일뿐이죠. 소통의 출구가 종이가 아닌 웹이라는 차이만 있는 겁니다. 흔히 출판만화를 비롯한 종이 매체의 시대가 완전히 흘러가버린 듯 얘기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종이의 필요성은 남을 겁니다. 물론 소통 형태의 대세가 IT인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앞으로 인터넷을 통해 작품을 발표할테지만 출판만화도 계속해서 발표할 생각입니다. 창작가는 매체를 가릴 것이 아니라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와의 첫 인연이라고 할까요, 어린 시절은 어떠셨습니까?

저는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더 가야 하는 신지도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어촌에서 제가 할 수 있던 것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게를 지고 일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어렵게 섬마을까지 들어 온 만화책을 친구에게 빌려 읽은 게 만화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그런데섬마을에 들어온 만화책은 다 낱권이었어요. 앞뒤 편이 없으니 뒷이야기가 얼마나 궁금했겠어요. 미칠 것 같았죠. 몇 번을 다시 봐도 앞뒤를 모르겠더라고요. 그 때 본 작품이 김산호선생님의 ‘라이파이’예요. 그런데 어느 날 먼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라이파이가 '짠'하고 나타나서 뒷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이희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부모님과 함께 섬마을에서 살다가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처음으로 섬마을을 벗어나 처음 뭍에서 살게 된 것이다. 광주에 사는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 집과 학교 외에 다른 곳은 갈 생각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형이 만화방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낱권으로만 만났던 영웅, ‘라이파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나게 된다. 당시 그는 거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희재는 만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하며 여느 만화가들의 학창시절처럼 독자만화란에 열심히 투고했다.






중학 시절 출판사에 그림을 보내 2등으로 뽑히고, 이를 본 명랑만화의 대가 이정문 선생이 직접 보낸 편지를 받고 상경했다가 일주일 만에 낙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상석 선생의 ‘철인삼국지’라는 만화를 따라 그려 보냈었죠. 그런데 덜컥 2등으로 뽑혀 잡지에 실리더라구요. 정말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정문 선생님이 제가 그린 독자만화를 보고 우리 집에 편지를 보냈어요. '재주가 있으니까 서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고 아버지가 선생님한테 '잘 부탁한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어요. 중학교 졸업식도 참가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갔죠. 그런데 이정문 선생님이 새로 하기로 한 일이 틀어졌는지 절 책임질 수 없게 됐어요. 어린 시절이라 상처도 받았지만 지금은 이정문 선생이야말로 저를 만화계로 이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눈물의 수평선’, ‘엄마 찾아 삼만리’, ‘암행어사’ 등 6, 7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을 탄생시킨 김종래 화실에 들어가게 되셨는지요?

이후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고 저는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낮에는 만화 선생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신문 단칸 광고를 보고 찾아간 화실이 당대 최고의 시대역사만화가 김종래 선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문하생들과 함께 갈고 배경을 그렸습니다. 이정문 선생님은 저를 문하에 들이지 않았지만 만남을 유지하며 틈틈이 일거리를 주선해 줬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요. 그 인연으로 당시 유행하던 '명랑' '야담과 실화' 등의 잡지에 2페이지짜리 명랑만화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부당한 것을 참지 못했던 심술통식 폭소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내용으로 감동을 전했던 두 선생의 작업은 그대로 만화가 이희재를 만들었죠.


결국 김종래 선생과 이종문 선생 모두 만화가 이희재의 스승이군요. 두 분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정문 선생님이나 김종래 선생님은 언제나 공부를 강조했어요. 배우지 않으면 반쪽짜리 만화가가 된다고 했죠. 그림재주가 있어봐야 이야기를 부리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형편이 안 좋아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해서 검정고시학원을 다니기도 했는데 이런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헌책방을 돌면서 작문기초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 사회학, 철학 관련 책들을 쉬지 않고 읽었어요. 그 속에서 이만화의 소재가 되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죠.






이희재하면 83년부터 ‘보물섬’에 연재된 ‘골목대장 악동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최고 권력자였던 골목대장 '왕남이'를 이사 온 '악동이'가 박치기로 제압하고 혁명에 성공한다는 줄거리의 ‘악동이’는 당시의 군부독재 아래서 권력에 아부하며 기생하는 현실 정치판과 이에 눌려 살아야 했던 민중의 삶을 성공적으로 패러디 했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보물섬'은 창작만화와 명작만화(아동교양물 형식을 취한 소설이나 동화를 각색한 만화)를 절반씩 게재했고, 심의기관에서 이를 통제하고 있었다.




‘골목대장 악동이’도 빅토리아 빅터의 '악동일기'를 한국식으로 각색한 작품이고,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위기철의 소설 ‘아홉살 인생’ 등을 원작으로 한 ‘이희재식 만화’를 다수 발표하셨습니다만.

그간 제가 한 작품들을 보면 대중적으로 크게 사랑 받았던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이 있어요. 오리지널리티가 좀 부족한가 싶기도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각색하는 일이 좋았습니다. 작품설정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될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구조를 빌려오면 공감대 형성이 용이하기도 하구요.


1988년 바른만화연구회를 결성, 이른바 만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어떤 상황에서 운동을 주도하셨습니까?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간행물에 대한 심의 기준이 완화되면서 좋은 만화창작 환경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만화 해적판이 폭력만화와 음란만화 시비를 불러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했어요. 너무나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을 했죠. 내가 생각하는 만화에 대한 기준과 출판업자나 돈만 보고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상식적으로 만화를 그리자고 했던 거예요. 당시 만화계에 넘쳐나던 만화공장, 일본만화표절, 문하생 착취 구조 등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앞으로 창작 방향에 대해 묻자 이희재는 화실 한 쪽에서 그간 틈틈이 작업했던 그림을 꺼냈다. 촛불 집회 현장에서 박재동과 함께 그렸던 작품도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의 유명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그렸던 그림도 있었다. 병풍식으로 접히는 화첩 한 권에 한 장소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화첩을 펼치자 2, 30면 가량의 그림이 기다랗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한 면 한 면 현장에서 붓을 이용해 그린 화첩을 펼치자 거대한 산이 되고 바다가 됐다. 이희재는 서정성 넘치는 유럽식 앨범만화와 함께 풍부하고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접이식 화첩만화를 중심으로 차기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이 변해서 웹툰이 유행이지만 ‘디지털형식보다 디지털적 사고가 중요하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 만화계에서는 웹툰의 발전과 함께 인터넷이 수용하지 못하는 형식의 만화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는 취지의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바른만화’처럼 그의 손을 통해 우리 만화계를 긴장시킬 수 있는 색다른 ‘만화선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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