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Ⅰ] 마(魔)의 목요일, 세계경제가 수렁으로 빠지다.
[History CultureⅠ] 마(魔)의 목요일, 세계경제가 수렁으로 빠지다.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5.2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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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극단의 길로 … 결국 2차 세계대전 불러와
[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History CultureⅠ] 세계경제공황



마(魔)의 목요일, 세계경제가 수렁으로 빠지다.


정상적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극단의 길로 … 결국 2차 세계대전 불러와



▲경제공황직후 무료로 배급되는 빵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실직자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뒤에 10여 년 동안 미국의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용품으로 사용하던 라디오가 대량 생산되어 1930년에는 전체 가정의 40%가 보유할 정도였다. 자동차도 전쟁 전에는 사치품이었으나, 1930년에는 거의 모든 가구가 한 대씩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상품은 많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1924년부터 1929년 사이에 실질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아서 노동자의 구매력이 형편없이 낮았다. 이런 문제는 공황으로 이어져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그 결과 실업자가 13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전체 노동력의 사분의 일에 이르는 수치였다. 미국발 경제공황은 결국 세계로 확대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에 이른다.





경제공황의 배경


  경제공황이란 영어로 great depression이다. 디프레션은 보통 디플레이션(deflation)과 혼동되기 쉬우나 서로 다른 개념이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말로 통화축소를 의미한다. 반면 디프레션은 높은 실업률, 임금삭감, 물가하락, 기업 활동의 위축을 동반하는 경기침체를 의미한다. 


  경기침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때문에 경제가 호황과 불황국면을 순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황 뒤에는 불황이 오고 반대로 불황 뒤에는 호황이 오기 마련이다. 확장된 생산만큼 소비가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과잉생산 국면이 지나면 다시 경기가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 50-55년을 단위로 하는 콘트라티에프 주기 등 경기순환에는 여러 주기들이 있다. 그럼에도 1929년의 디프레션을 세계경제공황, 또는 대공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하고 장기적이며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정도로 큰 영향을 남겼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1차대전으로 인해 침체되었다가 1920년대 초부터 다시 살아나 1920년대 내내 번영을 누렸다. 특히 미국경제가 그랬다. 미국은 1923년부터 29년까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 사이에 산업생산은 두 배로 늘었고 GDP는 40%가 증가할 정도였다. 미국이 전시의 피해가 없었던 반면 유럽국가들에게 군수품이나 식량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나 모든 산업 부문이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농업부문은 20년대를 통해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시의 증가된 수요에 힘입어 경작지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렇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유럽에서의 농업생산이 회복되자 과잉 생산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게다가 1925년에서 29년까지는 평균 작황이 유지되었으므로 그 심각성은 더했다. 부채를 지고 큰 농토를 장만한 농민들은 거의 파산상태에 빠지고 일반 농민들의 구매력도 크게 떨어졌다. 


  또 1920년대 후반 유럽을 포함한 세계경제의 호황은 그렇게 건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미국자본의 수출과 미국 수입시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은 미국경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1924년부터 미국자본이 독일로 유입되어 독일경제를 크게 회복시켰고 그것이 다시 유럽전체의 경기상승을 이끌었던 것이다.  


  1929년 이전에도 유럽경제는 미국투자자들이 미국 주식시장의 호황에 편승하기 위하여 자금을 빼가기 시작하자 점차 나빠지는 조짐을 보였다. 그리고  미국의 주식투자 붐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호황기의 통화팽창으로 28년부터 달아오른 주식시장이 1929년 10월 24일 돌연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마의 목요일이라고 불린 이날 천정까지 올랐던 주식의 거품이 꺼지며 호황 국면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는 미국의 주식투자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며 점차 실물경제 부문으로 파급되었다. 또 미국경제가 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 때문에 이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발전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은 생각보다는 천천히 진행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처음에 그것이 세계 경제의 대파국을 가져올지 잘 예상하지 못했다.  





1929년 10월 24일 이후, 공황의 전개  


  1929년 11월말까지 주가는 40%나 하락했다. 그 후 주가는 지속적으로 떨어져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다우존스 공업지수는 381에서 41로 하락했다.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약 10만 개의 기업의 파산했고, 투자는 7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감소했다. 기업들의 총 이익은 1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다. 경제규모가 이전보다 절반 정도로 줄어들며 GNP는 800억 달러에서 420억 달러로 떨어졌다. 도매물가는 40% 떨어졌고 근 6,000개의 은행이 파산했으며 이와 함께 수백만 명이 저축한 250억 달러의 예금도 사라졌다. 


  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실업자 수는 300만 명이었으나 그 후 매주 10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 1933년 3월에는 전체 노동력의 1/4인 1,3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트타임으로 고용되거나 임금 삭감을 당했다. 그리하여 미국 노동력의 절반가량이 실업상태에 있거나 불완전 고용상태에 빠졌다. 노동임금은 이 4년 동안에 40%가 떨어졌다.  


  경제 파탄과 절망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32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일은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구호, 경기 회복, 개혁을 목표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루스벨트는 경제에 적극 개입해서 공황을 해결해 정부가 기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경제사정이 나빠지자 미국 투자자들은 해외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국자본에 가장 많이 의존하던 독일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독일경제가 좌초하자 독일경제와 전체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유럽 다른 나라들의 경제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가 온통 경제공황에 휩쓸리게 되었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 것도 경제공황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에서의 진전, 히틀러의 집권


  미국자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독일경제는 미국의 공황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1929년 말에서 1930년 초 사이에 미국이 단기자본을 회수하며 어려움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1931년에 가면 금융시장이 심각한 상태에 빠졌다. 


  독일의 실업자수는 1929년 여름에 80만 명이었으나 30년 12월에는 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31년 7월에는 550만으로, 1932년 초에는 전체 노동력의 35%인 600만 명에 달하여 엄청난 사회불안을 야기 시켰다. 산업생산도 50% 수준으로 떨어졌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 것도 경제공황 탓이다. 1929년 이전에만 해도 고작 원내 12석을 차지하고 있던 나치당이 경제공황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급격하게 세를 불린 것이다. 이는 1930년 3월에 경제공황으로 사회민주당의 헤르만 뮐러 내각이 무너지며 의회 내에 안정된 다수파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의 중심이 사라지고 법령이 헌법 48조의 대통령 긴급령에 의해 발포될 수밖에 없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했고 의회의 이런 무능함은 극심한 경제침체와 실업으로 고통을 받던 대중들을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나치당과 공산당과 같은 과격정당들이 크게 세를 불렸다. 그 가운데서도 나치당인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당의 정치적 성장은 화려했다. 의석수가 1930년 9월 선거에서 107석으로 크게 늘어났고, 1931년 7월에는 230석을 얻어 원내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는 즉각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과격한 구호에 의한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에 지명됨으로써 권력 장악의 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1933년에 집권하며 곧 독재체제를 수립한 나치당은 군축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등 도전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또 광범한 재무장 정책을 시작했다. 재무장정책은 아우토반의 건설 등 건설사업과 함께 독일의 유효수요를 증대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경제적 자급자족을 이루려는 정책 기조도 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경제정책도 미국의 뉴딜 정책과 거의 비슷한 효과를 냈다. 경제가 점차 회복되어 1938년에 가면 구매력이 1929년 수준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실업자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세계정세에의 영향, 전쟁이라는 파국으로


  세계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공황이 야기한 광범한 위기에 대처할 정치적이거나 지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황이 심각한 경제, 사회적, 나아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고 국제 공조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과격한 정책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제는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금본위제도가 포기됨으로써 환율을 정할 국제적 기준이 사라졌다. 각 나라들 사이에는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이기 위해 환율을 낮추려는  환율전쟁이 벌어졌다. 또 너도나도 관세장벽을 설치하여 수입을 줄이려고 애썼다. 이는 그때까지의 자유무역적인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체제가 사회, 정치적 혼란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1차대전 이후 만들어진 많은 민주체제들이 무너지고 그 대신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만이 아니라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런 상태에 빠졌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같이 민주제도가 그 나름으로 정착된 나라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보전할 수 있었으니 이런 나라들에서도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극단주의 운동들이 맹위를 떨쳤다.   


  대공황은 실업과 빈곤을 양산함으로써 개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인종적 갈등을 야기 시켰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급격한 성장은 그 결과이다. 국제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국가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특히 파시스트 국가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공황이 전쟁을 야기 시켰으나 다른 한 편에서 전쟁이라는 대파국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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