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흔들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4.05.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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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경쟁자 중국-러시아 위협으로 위기 직면한 오바마 정부
[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흔들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강력한 경쟁자 중국-러시아 위협으로 위기 직면한 오바마 정부






미국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그리고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과거가 무색할 만큼 최근 미국의 국제적 발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그간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미국이 유지해왔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20세기 중반 세계를 양분하던 이념대립은 자유주의 진영의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의 소련을 중심으로 팽팽한 긴장감의 ‘냉전(Cold War)’ 체제를 구축해 왔다. 직접적인 무력충돌 없이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이나 경쟁, 군사적 위협으로 점철되던 냉전 시대가 끝난 후 미국은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계를 주도적으로 지배하려는 경향을 보이던 미국에 많은 국가들은 시기적 또는 견제적 시각으로 우려를 표명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13년 ‘미국발 리스크’의 여파로 전 세계 시장경제가 요동친 이후 많은 국가들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체제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지난해 하반기, 사상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 목전까지 치달았던 미국은 그 신뢰도를 잃기 시작했다. 경기침체와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이 겪던 경제적 어려움은 외교 무대에서도 영향력 강화로 드러나고 있다.





크림반도 합병에 이어 친러 세력 분리 독립 주장

  지난 4월 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4자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유럽연합, 미국의 외교 수장들이 모여 우크라이나 긴장 완화를 위한 시급한 조치를 취한다는 데 합의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이어 친러 세력의 분리 독립 주장에 따른 우크라이나 내부의 무력시위 상황은 또 다른 대형 유혈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번갈아가며 친러 세력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으며, 미국은 러시아 측에 추가제재를 언급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난 크림반도 합병에서도 드러났듯 미국의 영향력은 예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지난 크림반도 사건 발생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엄포를 놨지만, 결국 십수명의 경제제재 명단을 발표하는 데 그쳤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되고 군사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4자회담 이후 수전 라이스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합의에 상응하는 러시아의 조치가 보이지 않으면 러시아는 추가적인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추가 제재는 러시아 경제의 아주 핵심적인 부문을 겨냥하게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이에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 공보비서는 “그런 발언은 용납할 수 없으며 미국이 러시아를 마치 잘못한 학생처럼 다루고 있다”고 받아쳤다. 회담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친러세력은 무력시위를 계속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곧 열리는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약해진 미국, 강경해진 러시아

  이 같은 양국 간의 힘겨루기는 미국의 지난 ‘대러시아 인권법안(마그니츠키법)’, 러시아의 동성애자 차별법안 등 다양한 사안에 걸쳐 진행돼 왔다. 지난 2009년 러시아 경찰의 부패를 고발했다가 체포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숨진 러시아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사건은 러시아의 인권탄압을 상징하는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됐었다. 이에 미국은 러시아인권법을 제정하면서 러시아 인권 문제를 부각시키는 한편, 블랙리스트 18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의 명단에서 정작 주요 인물들의 이름은 빠져 있어 ‘모스크바를 아주 화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워싱턴의 속내를 보여준 것(모스크바타임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며 몸을 사리는 동안 러시아는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세력권과 발언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에드워드 스노든 전 국가안보국(NSA) 직원 문제가 그 일례라 할 수 있다. 미국정부의 불법적인 개인감찰 문제를 폭로한 스노든은 정부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을 신청했다. 당시 미국이 국가기밀 누설죄로 스노든의 신병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망명 허가를 내주며 스노든을 옹호하고 나섰다. 

  시리아 사태 때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으로 1,300명 이상이 사망했지만, “화학무기 사용은 절대 넘어선 안 될 선(레드라인)”이라고 경고했던 미국은 즉각적인 군사 조치 대신 공격 승인을 요청하는 등 미온적 태도를 보이다가 러시아의 중재안 덕에 가까스로 체면을 살렸다. 미국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만큼, 러시아는 강한 모습으로 기존 국제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국가들은 G8 체제에서 러시아를 축출했지만,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에는 서방 말고도 많은 친구들이 있다”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시아 중시 정책 위협하는 미·중 관계

  미국이 러시아와 정면충돌을 회피하는 것은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에 따른 재정·군사 재배치의 부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경제 악화로 국방 예산을 대폭 삭감한 미국이 그간 도맡아 오던 ‘세계 경찰’의 지위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현재 유럽 주둔 미군은 냉전 절정기의 40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6만 7,000명에 불과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인 유럽 역시 재정위기로 러시아와 맞대결할 여력이 없다. 

  문제는 오바마 대통령의 무관여·비개입 외교정책이 아시아에서도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대한 자원 부존량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와 함께 미국의 주요 라이벌로 손꼽히고 있는 중국은 최근 미국과의 외교전에서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최근 센카쿠 열도에 대한 중·일 간 영토분쟁 문제로 관계가 냉랭해진 양국은 ‘군사개입’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팽팽히 맞서도 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 제3해군의 존 위슬러 사령관은 “중국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점령하면 태평양에 주둔하는 미 해군 해병대가 섬을 되찾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헤이글 장관의 “미국은 중·일 갈등과 관련해 일본을 보호할 것”이라는 발언에 이어진 것이다. 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4월 14일 인민해방군 공군 지휘소를 방문해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정신 무장을 강화하고,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전투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으며, 창완취안 중국 국방부장은 “영토수호를 위해 군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며 맞섰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인 군사력 충돌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재정 악화 상태에 빠진 미국이 무리한 군비 지출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최근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가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전 세계 군비 지출 총액은 1.9% 감소했으며, 군비 1위 지출국인 미국은 전년도보다 7.8% 줄어든 수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2위 지출국인 중국은 전년도보다 7.4% 늘었고, 3위 지출국인 러시아는 4.8% 증가했다. 미국의 군비 축소는 그동안 전쟁 억제력으로 작용했던 미국의 힘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며, 러시아와 중국이 이 기회를 틈타 군비를 확대하며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뜨거운 평화의 시대, 국제 관계에서의 우리의 역할

  국제무대에서의 러시아와 중국의 대두로 미국 주도의 초강대국 시대는 저물고 힘의 다극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마크 갈레오티 뉴욕대 교수는 “현 상황은 ‘신 냉전’이라기보다 ‘뜨거운 평화(Hot Peace)’의 시대”라고 말했다. 냉전의 상대 개념인 ‘핫 피스 시대’는 지역적으로는 직접 충돌을 불사하면서도 전 세계적으로는 확산되지 않는 갈등을 말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과 2007년 에스토니아에 대한 사이버 전쟁, 2008년 조지아 침공 등에서 군사적 작전과 정치 공작, 비밀 작전, 경제적 압박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이 같은 현상은 과거 냉전시대처럼 이데올로기 팽창을 위한 강대국 간의 생존 경쟁이 아니라 외교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이익의 충돌 시대라는 점에서 다르다.

  국제 정세의 변화는 한국 외교에도 새로운 숙제를 던지고 있다. 전통의 블록 외교 대신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창조 외교’가 그만큼 절실해졌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지난 3월말 열린 재외공관장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탈 냉전 후 국제질서에 새로운 혼돈을 야기하고 있다”며 “불확실성과 혼돈이란 도전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기회로 만드는 외교력 강화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한 전문가는 “과거처럼 지배국가가 대체되는 과정에서의 대규모 긴장이나 대결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강대국이나 약소국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복잡한 국제질서가 형성됐기 때문에 우리 같은 중견국의 역할이 부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의 도전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한·미 동맹이 국가 정책의 큰 줄기를 차지하는 우리의 역할이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의 대미 파트너십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지난 4월 15일 중국을 방문했으며 푸틴 대통령은 5월 중으로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3월 취임 이후 첫 번째 해외방문국으로 러시아를 선택한 이래 중·러 정상은 지난 2013년에만 모두 4차례 회담을 가졌다. 천연가스 수출을 포함한 중국 러시아 간 경제협력도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해 온 유럽은 최근의 관계악화로 에너지 수입원 다원화를 구상중이며, 중국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핵 미사일 능력을 공개하며 무력을 과시하고 있다.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 오바마 정부가 어떤 타개책을 마련하게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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