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 ] 불굴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
[History Culture I ] 불굴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
  • 방성호 기자
  • 승인 2014.04.25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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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방성호 기자]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


한 인간의 생애가 담긴 자화상





서양 미술사에서의 ‘근대’라는 정의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달라, 역사적 의미에서는 르네상스 이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난 14~16세기 동안 서양미술의 한 줄기를 책임졌던 르네상스의 태동이 점차 사라져갈 때 쯤,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69)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프란스 할스, 루벤스, 반 다이크, 벨라스케스 등 유명한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렘브란트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의 젊은 시절의 성공과 파산에 이르기까지의 비애, 그리고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까지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자화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자화상들은 일종의 독특한 자서선인 셈이다.




산전수전의 인생사


  렘브란트는 1606년에 레이덴(Leiden)이라는 도시의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해서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마침내 화가가 된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 당시 학자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25세가 되던 해에 렘브란트는 고향 레이든을 떠나 상업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으로 그의 화실을 옮겼다. 거기에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집을 장만해서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수집하면서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 


  1642년 그의 첫 부인이 사망하면서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 대한 렘브란트의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해 얼마안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14년 후 그의 채권자들이 그의 집을 팔고 그의 수집품들을 경매에 올려 처분해버렸다. 다만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의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설립해 형식적으로 렘브란트를 그 회사의 고용인으로 만드는 협정을 만들었다. 그 덕택으로 그는 만년의 위대한 걸작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충실한 반려자들의 생은 짧았다. 1669년에 결국 렘브란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판1 - 렘브란트 자화상, 1655년경, 빈 미술사 박물관



  흔히 인생을 파도에 비유하기도 한다. 위로 높이 솟아오를 때가 있으면 그 뒤에 바닥으로 떨어져 포말로 사라지게 되는 파도와 같은 굴곡을 렘브란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모든 화가들에게 있어 그들 나름대로의 희노애락이 존재하겠지만, 렘브란트 그가 살아온 소박한 화가의 삶에서 해석하자면 그의 인생굴곡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도판 1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우리가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용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면밀히 살펴보고,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에 내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그의 꿰뚫어보는 응시만이 있을 뿐이다.    




▲도판2 - 얀 지크스 초상화, 1654년, 식스 컬렉션



화가의 손을 빌린 심리적 통찰력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바라보면 다른 초상화들에 비해 상당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인물을 해석하는데 있어 상당한 통찰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딱딱한 그룹 초상화에서 인물 개개인의 치밀한 심리묘사를 더해 좀 더 생생한 감정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전달했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내면세계에 집중하면서 미적 감동을 넘어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심오한 이해가 없었다면 렘브란트는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이며 후에 암스트레담 시장이 된 얀 지크스(도판 2)의 초상화와 같은 위대한 작품들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프란스 할스의 생생한 초상화(도판 3)와 비교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 이유는 할스는 우리에게 실감나는 스냅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에 렘브란트는 인물의 전 생애를 다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할스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도 그의 예술적인 기량, 즉 금실로 짠 끈의 광택이나 주름 깃에 아롱거리는 광선들을 표현하는 기량을 맘껏 과시했다.

 

▲도판3 - 피터르 판 덴 브루커의 초상, 1633년, 켄우드 하우스



  그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수도원장이 재촉하는 요구에 대한 답변인 ‘내가 만족할 때’와 유사하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완성은 ‘화가가 그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했으며 그래서 그는 얀 지크스의 장갑 낀 왼손을 단순한 스케치 형태로 남겨둔 채 완성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왼손은 오히려 인물에서 느껴지는 생명감을 고양시켜주고 있다. 


  역대 화가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인물의 성격과 지위 등을 요약해 묘사한 방법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나 무대 위에 선 배우같이 느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초상화들도 충분히 실감나고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복잡한 인간 심리의 단편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모나리자’만 하더라도 언제까지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초상화들에서는 실제 인물과 직접 대면해 그 사람의 체온, 공감을 구하는 절박함과 외로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의 수많은 자화상에 나타난 그의 ‘예리하고 침착한 눈’은 인간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심오한 이해와 끊임없는 관찰력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도판4 - 노년의 렘브란트 자화상1, 1659년,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존재는 네덜란드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당시의 어떤 화가도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화, 드로잉, 판화 등에서 탁월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 지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일 것이다. 빛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 대부분 밝은 색감을 강조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두운 색감이 존재해야만 그 극명한 대조가 완성된다.


  렘브란트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보다 밝은 색을 훨씬 더 적게 사용했다. 그의 작품들을 볼 때 느껴지는 첫인상은 어둠침침한 갈색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색조들은 몇 안 되고 밝고 현란한 색채와의 대조를 보다 강하고 힘차게 돋보이게 만든다. 그 결과 그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빛은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렘브란트를 흔히 ‘빛과 어둠의 화가’로 표현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에게 있어 빛은 단순히 구도나 명암을 위한 요소가 아니라 그림에서 나타난 상황, 인물의 심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장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를 위해 빛과 대조되는 어둠 또한 극명하게 드러낸다. 


▲도판5 - 노년의 렘브란트 자화상2, 1669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따라서 그의 초상화에 나타나듯이 인물의 심리적 표현까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명암의 극명한 대조가 일조하고 있다. 끈질긴 관찰력으로 표현된 인물의 생김새와 함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아우르는 명암의 대비는 렘브란트의 의도된 목적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표현기법이다.   


  렘브란트의 예술혼은 작품에서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에서 깊은 나락으로 빠지기까지의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단 하루도 붓질을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던 성실한 화가였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시절에 더욱 작품 활동에 몰입해 수많은 작품을 남긴 순수이성의 화가였다. 지금 우리가 감상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들(도판 4,5)은 그의 경제적 몰락 이후 죽기 직전까지 약 20여 년간의 작품들이다.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표현했던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딜레마인 내면세계의 정체성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심미주의적 가치관의 완성을 향한 그의 성찰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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