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
한 인간의 생애가 담긴 자화상
서양 미술사에서의 ‘근대’라는 정의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달라, 역사적 의미에서는 르네상스 이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난 14~16세기 동안 서양미술의 한 줄기를 책임졌던 르네상스의 태동이 점차 사라져갈 때 쯤,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69)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프란스 할스, 루벤스, 반 다이크, 벨라스케스 등 유명한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렘브란트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의 젊은 시절의 성공과 파산에 이르기까지의 비애, 그리고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까지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자화상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자화상들은 일종의 독특한 자서선인 셈이다.
산전수전의 인생사
렘브란트는 1606년에 레이덴(Leiden)이라는 도시의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해서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마침내 화가가 된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 당시 학자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25세가 되던 해에 렘브란트는 고향 레이든을 떠나 상업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으로 그의 화실을 옮겼다. 거기에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집을 장만해서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수집하면서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
1642년 그의 첫 부인이 사망하면서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 대한 렘브란트의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해 얼마안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14년 후 그의 채권자들이 그의 집을 팔고 그의 수집품들을 경매에 올려 처분해버렸다. 다만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의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설립해 형식적으로 렘브란트를 그 회사의 고용인으로 만드는 협정을 만들었다. 그 덕택으로 그는 만년의 위대한 걸작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충실한 반려자들의 생은 짧았다. 1669년에 결국 렘브란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