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I] 길 잃은 한 인간의 구원을 향한 영원한 순례, 단테
[History Culture II] 길 잃은 한 인간의 구원을 향한 영원한 순례, 단테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4.03.2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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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




길 잃은 한 인간의 구원을 향한 영원한 순례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최후의 중세인’, 단테(Dante)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는 이탈리아 3대 문인으로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이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 중 르네상스 시대의 선구적 문인이자 ‘최후의 중세인’이라 불리는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는 피렌체 출생으로 청년기의 시집인 ‘신생(Vita Nuova)’, ‘향연(Convivio)’ 등의 작품과 불후의 명작인 ‘신곡(Divina Commedia)’을 통해 인간적인 감정과 개성에 대한 빛나고 생생한 인간묘사로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는 예언자 또는 신앙인으로서, 박해를 가한 조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을 남기며,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했다.




사랑, 망명 … 그리고 영원한 안식

단테는 1265년 3월,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원래 귀족에 속했지만 단테가 태어날 당시에는 사실상 몰락한 상태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임대 및 대부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1274년 5월 1일, 아버지를 따라 유력자인 폴코 포르티나리의 집을 방문한 단테는 풀코의 딸인 베아트리체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9세, 그의 나이는 10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13세 때, 피렌체의 또 다른 유력자인 마네토 도나티의 딸 젬마와 약혼했고 9년 뒤 결혼하게 된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만난 지 딱 9년만인 1283년 5월 1일,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재회하게 된다. 잠시 인사를 나눈 정도에 불과했지만 황홀해진 단테는 그날 밤 꿈속에서 그녀와 함께 사랑의 신을 목격한다. 잠에서 깨어난 단테는 그때부터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1290년 6월, 베아트리체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고, 슬픔에 빠진 단테는 그때까지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쓴 시를 엮어서 ‘신생(1295년)’이라는 책으로 간행한다.

  단테가 살았던 14세기 후반의 피렌체는 당파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요직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비교적 공평한 처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295년 정계에 입문한 단테는 머지않아 탁월한 지성과 언변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1301년 프랑스 귀족인 샤를 백작이 교황의 요청으로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로 진격하자, 단테는 교황을 설득해 전쟁을 막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로 향한다. 하지만 그 사이 피렌체는 함락되고 단테는 반대파에 의해 뇌물 수수 및 비리 혐의로 재판에 서게 된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단테는 귀향을 포기하고 이때부터 줄곧 타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단테의 최고 걸작인 ‘신곡’은 그의 삶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단테의 말년은 ‘지옥’에 가까울 정도로 불우했다. 1314년에 ‘신곡 - 지옥’이 간행되며 명성은 크게 올랐지만 망명객인 그의 내면은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그의 내면이 겉으로도 드러났던 모양인지 당시의 단테를 처음 본 베로나의 어떤 여자들은 “저 사람 행색을 보니 정말로 지옥에 다녀온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1318년,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라벤나의 외교 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다가 병에 걸려 1321년 9월 14일 생을 마감한다. 56년간의 삶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9년을 망명객으로 보낸 뒤 맞이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가 죽은 뒤 100년이 넘어서야 피렌체는 실수를 깨닫고 단테의 유골을 귀향시키려 했지만 라벤나의 거절에 번번이 무산된다. 1519년에 교황이 그 분쟁에서 결국 피렌체의 손을 들어주자, 라벤나는 단테의 유골을 몰래 빼돌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그리고 1865년, 모처에 은닉되었던 단테의 유골은 라벤나의 성프란시스코 수도원에서 500여년만의 영원한 안식을 찾게 된다.




불멸의 연인 베아트리체, 구원을 노래한 신곡(神曲)

단테의 문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여자인 베아트리체(Beatrice)는 단테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피렌체 시의 폴코 포르티리아의 딸로서 1290년에 다른 곳으로 시집간 실재의 인물이라는 설과 단테가 꾸며낸 인물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단테와 단 두 번 마주쳤을 뿐인 베아트리체는 이후 단테의 꿈속에서, 그리고 작품 속에서 영원불멸의 존재로 남게 된다. 

  베아트리체가 24살의 나이로 사망한 이후, 충격을 받은 단테는 마음의 위안을 찾아 광범위한 독서에 몰입한다. 이때 그는 철학자 보에티우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을 숙독했으며, 그런 독서 체험으로부터 중세의 종교 및 사상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철학 서사시 ‘신곡’의 기본 구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테가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1307년으로 추정되나 그의 열렬한 추종자 보카치오는 이에 관해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망명 당시 단테는 ‘지옥’의 처음 일곱 곡을 완성한 상황이었으며, 이 원고를 압수한 정적들조차도 그 문학성에 감탄한 나머지, 원고를 단테에게 돌려보내며 완성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단테는 평소 존경했던 로마 시대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부활절 전후 일주일 동안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한다. 단테의 서사시는 ‘지옥’, ‘연옥’, ‘천국’이 각각 33개의 ‘곡(canto)’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서곡을 합쳐 모두 100곡에 이른다. 원래 시 세 편을 가리키는 제목은 ‘단테의 희극(comedia)’이었으나 단테의 예찬자인 보카치오가 이 작품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디비나(divina, 신적인)’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라 디비나 코메디아(신적인 희극)’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곡(神曲)’은 일본의 작가 모리 오가이가 처음 사용한 표기를 따온 것이다.





단테의 문학적 성취와 영향력

단테의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의 이탈리아어를 확립한 것이다. 이전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는 저마다의 방언을 사용했다. 단테는 ‘신곡’을 집필하며 라틴어 대신 피렌체 방언인 ‘토스카나 방언’을 사용했고, 이후 토스카나 방언이 공용어처럼 사용되게 되었다. 단테는 ‘속어론’에서 지식인의 공용어인 라틴어보다 각 지역의 일상어인 속어로 시를 쓰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단테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니라 일상어로 쓴 까닭은 그래야만 지식인 말고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문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학사적인 영향력 면에서 단테는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문학적 성취나 영향력에서 그는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괴테와 발자크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세계적인 인문학 석학 해럴드 블룸은 “세계 역사에서 단테를 주목하지 않고는 천재를 논할 수 없다. 그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풍부한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 ‘신곡’과 필적하거나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가 남긴 39편의 희곡 중 가장 뛰어난 20여 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단테 사후 에즈라 파운드와 T.S. 엘리엇 등 수많은 작가들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단테의 조각배(1822)’로 처음 명성을 얻었다. 조각가 로댕의 ‘지옥의 문’은 ‘신곡-지옥’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며, ‘생각하는 사람’도 그 조각의 일부다.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신곡’을 소재로 ‘단테 교향곡’을 쓰다가 “어느 누구도 천국의 기쁨을 음악으로 묘사할 수는 없다”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만류로 ‘지옥’과 ‘연옥’까지만 쓰고 ‘천국’의 작곡을 단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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