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Culture I] 서양 중세시대 재평가 움직임
[History Culture I] 서양 중세시대 재평가 움직임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4.02.13 1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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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중세는 종교적 광기와 전쟁, 흑사병의 시대인가?


중세 천년은 겨울이 아닌 가을… 하위징아 이래로 재발견 움직임 활발



▲ 십자군 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던 카락성의 현재 모습



중세(中世)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4-6세기)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14-16세기)와 더불어 근세가 시작되기까지 기간, 즉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약 1,000년에 걸친 시기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동양사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유럽이 아닌 지역에 '중세'가 존재하였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중세의 메인이벤트, 십자군 전쟁

독일어권과 영어권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1,000년간을 다시 전 ·후기로 나누어 10세기까지를 중세 전기, 그 이후를 중세 후기로 나눈다. 일설에 따르면 중세는 르네상스로 끝나지 않고, 18세기의 프랑스 혁명까지 계속된다고 보고 있으며, 또 18세기의 계몽사상, 17세기의 과학혁명, 16세기의 종교개혁 등을 중세의 끝,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등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대체로 중세의 끝을 17, 18세기로 늦추는 것이 최근의 특징이다.

  길고 긴 서양 중세시대의 대표적 사건을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흔히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중세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십자군 전쟁일 것이다. 중세는 기독교의 시대였고,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의 수장인 로마 교황의 세력이 등등하던 때에 일어났다. 중세에는 순례 의식을 중요시하였다. 순례는 고생스러운 여행과 위험을 겪으며 성지를 참배하고 영혼의 구원을 얻으려고 행해졌다. 수많은 순례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은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이었다. 11세기에 아라비아인을 내몰고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된 셀주크 투르크는 이슬람교를 열렬하게 믿으며 기독교 신자를 적으로 생각하여 기독교 순례자들을 학대하였다. 때문에 서유럽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셀주크 투르크의 손에서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은 1096년부터 1272년까지 근 200년에 걸쳐 모두 8회 파견되었다. 제1차 원정 때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했으나, 그 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십자군의 이미지는 사악한 이교도와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로 유럽 문화에서 긍정적인 모티브로 생각되었다. 그라나 현대에 이르러 십자군 전쟁은 재평가되는 되고 있는 추세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십자군 운동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을 내놓고 있으며 그 의도가 단순히 성지 회복 같은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 상업과 문학의 발달처럼 당대에 십자군이 미친 긍정적인 효과 못지않게 부정적인 면 또한 비중 있게 조명하고 있다.



▲1347년 처음 창궐한 흑사병은 당시 유럽 전체 인구의 1/3에 달하는 2,500만 여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중세는 과연 암흑기인가

일반적으로 중세 유럽을 두고 인간성과 합리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특히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던 십자군 전쟁과 유럽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 그리고 마녀사냥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광기로 점철된 중세의 이미지는 실제로 어둡기만 하다. 2010년 ‘중세는 과연 암흑시대였을까’를 저서를 내놓은 사학자 박용진 씨는 그의 책을 통해 중세를 ‘암흑시대’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부터라고 말한다. 근대를 자처했던 르네상스 시기의 학자들이 본인들의 근대성과 합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중세를 깎아 내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의회제도나 건축양식(로마네스크와 고딕), 대학의 설립 등의 예를 들며 “중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유산들을 제공한 시대”라고 강조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진작부터 중세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레고리안 성가 정도만 알려져 있던 중세음악 연구에서는 중세시대의 춤곡들과 서사시에 대한 연구가 행해짐에 따라 아카펠라의 시원이 되는 성가곡들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아서왕 이야기의 멀린이  영국혼란시대의 종식을 염원했던 음유시인이었다는 등의 흥미로운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중세에 대한 재인식의 시초를 가능케 한 시초가 바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역작 ‘중세의 가을’이다. 20세기 초에 내놓은 이 책에서 하위징아는 일종의 중세시대 하위문화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서정시를 예로 들며,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되찾은 르네상스 이전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에 걸 맞는 인식과 교양을 쌓고 있었으며, 그들이 부각되지 못한 것은 막강한 종교 권력에 눌려 숨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하위징아는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세시대는 겨울이 아니다. 중세는 마치 분명 저물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붉은 석양을 남기는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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