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비명 ‘6070 황혼육아’
소리 없는 비명 ‘6070 황혼육아’
  • 안수정 기자
  • 승인 2013.12.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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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안수정 기자]

[Culture Focus]


소리 없는 비명 ‘6070 황혼육아’


노후 즐길 여유 없이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고충만 가중




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정임(62·여)씨는 8살짜리와 3살짜리 손자 두 명을 돌본다. 당초 김 씨는 손자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손자 봐주지 말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 늙어서 누가 애 보고 있느냐”며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가 입덧으로 고생해 잠깐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아이를 돌봐달라고 하는데 차마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3년 만 키워주기로 마음먹었다. ‘남의 손에서 자라는 것보단 내가 키우는 게 낫겠지’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는 사이 둘째 손자가 태어나고 며느리가 일을 그만두지 못하면서 육아는 고스란히 김 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그는 “돈 벌겠다는데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이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지 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도 “언제까지 아이들을 키워야 할지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맞벌이 가정의 영·유아 두 명 중 한 명은 할머니·할아버지 손에서 자란다. 은퇴 후 삶의 여유를 즐겨야 할 노년층이 이른바 ‘황혼육아’에 매달리는 것이다. 손주를 보는 것은 물론 즐겁다. 하지만 1주일에 5일 이상, 하루 평균 9시간 이상 아이를 돌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황혼육아 급증

한평생 자녀를 키우는데 헌신한 아버지, 어머니들이 또다시 손자녀를 품에 안는 '황혼육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손자녀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은 자녀를 위해 은퇴 후 삶의 여유를 즐겨야 할 60~70대가 또다시 육아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아직 지역에서 조부모의 육아 실태를 파악한 사례는 없다. 통계청이 시행하는 인구조사에서 맞벌이부부 현황을 별도로 파악하지 않는 데다, 조부모의 양육 형태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만 맞벌이 가구와 한부모가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 자녀 대신 손자녀를 키우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추산할 수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근로시간 36시간 미만 여성 취업자 중 배우자가 있는 경우’ 조사 현황을 살펴보면 2009년 119만 5,000명에서 2010년 137만 명, 2011년 157만 9,000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또 최근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만 65세 이상 여성 노인이 출산가정양육도우미와 보육교사도우미로 나서고 있어 황혼육아와 노인일자리를 연계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 양육을 부모 중 누구에게 더 많이 맡길까.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7월 생후 36개월 미만 영아를 둔 여성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양육자의 53.8%가 외조부모에게 맡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조부모는 34.2%로 외조부모가 친조부모보다 1.6배 높게 나타났다. 경기도 가족여성연구원에 따르면 양육 시간은 1주일에 5일 이상, 하루 평균 9~11시간이었다. 조부모에 아이를 맡기는 이유 중 하나는 육아 도우미나 보육기관보다는 가족이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워킹맘들은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때문에 생기는 보육 공백도 조부모가 채워주기 때문에 일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부담을 덜 수 있다. 서문희 육아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최근에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30~40대의 젊은 세대의 부모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식들을 결혼 시키고 황혼의 문턱에서 편안한 노후를 맞이하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들의 꿈이다. 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손자녀를 떠안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100세 시대 대비 여성노인의 가족 돌봄과 지원방안 연구’ 보고서에는 부모가 손자녀를 돌보는 이유로 자녀의 직장생활에 도움을 주려고(78.3%), 자녀의 양육비 부담을 줄여주려고(35%) 등을 꼽았다. 자녀를 위해서 황혼육아를 결심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황혼육아를 피하고 싶은 노년층들의 통계결과도 눈길을 끈다. 지난 2012년 9월 서울시가 통계청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통계로 보는 서울 노인의 삶’에서 60대 노인들이 가장 희망하지 않는 노후생활로 ‘손자녀 양육’이 1위로 꼽혔다. 반대로 가장 원하는 노후생활 1위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노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혼육아를 하는 노인들이 많은 것은 ‘아이 기르기 힘든’ 경제사회여건의 탓이 크다.



양육 방식 차이로 자녀와 갈등

전과 같지 않은 체력으로 손주를 돌보면서 심신이 지치는 것과 함께 양육방식 등을 둘러싸고 자녀세대와 갈등을 빚는 것도 황혼육아를 맡은 노년층을 속상하게 하는 부분이다. 지난 2012년 경기도가족연구원이 조부모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황혼육아 실태조사’에 따르면 39.7%의 노인들이 양육방식을 문제로 자녀들과 갈등을 빚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에 육아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최윤자(57·여) 씨는 “젊은 엄마에 비해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매일 손녀와 집에만 있게 된다. 교육을 받고 싶어도 어디에 문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워킹맘 하모(34·여) 씨는 “부모님께 아이를 맡겨 죄송하지만, 가끔 아이가 다치거나 이상한 사투리를 말하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주의해달라고 요구해 불편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의 여러 육아관련 카페에는 양육방식을 둘러싼 세대갈등이 종종 화제가 된다. 손자녀를 보는 노년층들은 ‘우유는 제 시간에 정해진 양만 먹여라’, ‘낮잠은 정해진 시간에만 재워라’ 등 책에서 본 얘기를 줄줄 외며 잔소리하는 자녀가 밉더라고 털어 놓는다. 반면 젊은 세대는 ‘아이를 봐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런저런 민간요법을 맹신하는 부모님이 답답하다’며 호소하기도 한다.

한 네티즌은 “원래 엄마와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한 2년 간 아이를 맡기면서 많이 싸워서 지금은 서로 쌓인 것이 많아져 좀 멀어졌다” 면서 “아기 옷을 삶을 것이냐, 파우더를 발라줘야 하느냐, 먹을거리 문제, 기저귀를 채우는 시간 등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거나 아이 맡기겠다는 사람 있으면 말리고 싶다”며 자녀를 맡긴 뒤 깊어진 부모와의 갈등을 얘기했다.



자녀에게 양육비 받지만 큰 도움은 안 돼

손주를 양육하는 노인들의 경우 대부분 자녀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거나 ‘양육비’ 명목으로 용돈을 받고 있다. 보통 아이를 맡기면서 양육비 조로 용돈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액수는 각 집안의 형편이나 맡기는 아이 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지난 5월 보건복지부의 의뢰로 육아정책연구소가 실시한 ‘2012년 전국 보육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적인 평균은 월 25만 원 수준이다. 하지만 인터넷 육아관련 커뮤니티에서 거론되는 평균 ‘용돈’ 혹은 ‘양육비’ 수준은 50만 원에서 80만 원 정도였다. 해당 금액은 대체로 월 150만 원 정도를 지급해야하는 베이비시터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수준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2년 조사에서 손주 양육을 담당하는 국내 노인들의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이 약 8.86시간으로 나타났으니, 자녀들로부터 월 100만 원을 받는 다해도 시급은 5,000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하지만 조부모들은 입을 모아 ‘돈 보고 손주 키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말한다. “딸에게 양육비 명목으로 매달 50만원씩 받고 있다는 한 조부모는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면 과자값, 선물 등으로 나가는 푼돈이 많아 실상 남는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부모에게 자녀를 맡긴이들의 속도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직장에 복귀한 워킹맘 김효연(31·여)씨는 “한 달에 100만 원 가량 드렸는데 적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양육의 힘듦이라는 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라며 “혹여라도 어머니 몸에 무리가 갈까 집안일을 도울 가사 도우미도 일주일에 한차례 부르다보니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조부모의 급격한 체력 저하와 건강 악화로 의료비 부담 등의 사회적 비용 부담이 늘어나는 점이다. 6세 손자를 봐주는 최영실(64·여)씨는 “한참 뛰어다니는 손자를 쫓아다니다 보면 금세 체력이 바닥나 온몸이 쑤시고 밤마다 끙끙 앓는다. 관절염, 목디스크 같은 예전에 없던 병이 생겨 치료비 부담도 크다”고 털어놨다. 4세 손녀를 키우는 김순옥(여·62)씨도 “종일 손녀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친구 만날 시간도 없다. 늙어서 내가 왜 이 고생인가 하는 생각에 우울증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손자녀의 육아를 담당하는 조부모와의 갈등해소를 위한 자녀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한다. 해피엔드 조숙현 이혼전문변호사는 “조부모의 육아도 노동임을 인정해 정기적인 수고비를 드려야 하며 조부모가 건강해야 아이도 잘 양육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서 조부모의 건강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등이 황혼양육으로 인한 갈등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손자녀 돌보는 조부모에 대한 제도적 지원 절실

맞벌이가 늘어난 것에 비해 ‘일하는 엄마’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여전히 부족한 게 현실이다. 법으로 3개월의 출산 휴가, 1년의 육아 휴가가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 이를 다 챙겨 쓸 수 없는 직장이 많다. 걷기는커녕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를 두고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 엄마들은 월 100만 원이 넘는 베이비시터(아기돌보미)와 부모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집에 영아반이 있기는 하지만, 믿고 맡길 만한 곳은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에 비유할 정도로 어렵다.

이에 서울 서초구청이 시행하고 있는 ‘손주돌보미’ 사업은 자신의 손자녀를 돌보는 할머니들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전문보육 인력으로 육성하는 독특한 프로그램으로 주목받고 있다. 만 15개월 미만의 손자녀를 양육하는 70세 이하의 할머니가 25시간의 교육을 이수하면 시간당 6,000원을 월 40시간(최대 24만 원)까지 지원해 준다. 할머니들은 교육기간 동안 ‘아기 씻기는 법’, ‘베이비 마사지’ 등 아기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각종 정보를 습득한다. 지난 2011년 사업을 시작한 후 올해 8월까지 246명이 교육을 이수했는데, 평균 경쟁률이 3:1에 이를 만큼 인기가 높다. 해당 과정을 이수한 할머니들은 자신의 손저녀 양육을 마친 후 다른 가정의 ‘방문 돌보미’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손주돌보미’사업을 여성가족부가 연 400억 원을 들여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하자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 뿐인데, 정부가 아예 영유아 보육책임을 조부모에게 떠맡기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 같은 정책이 전국적으로 시행된다면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을 당연히 여기는 풍토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성가족부는 ‘손주돌보미’ 사업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러나 황혼육아를 맡고 있는 노년층에 대해 정보제공, 경제적 지원, 동료집단간 소통 등을 제공하는 이 프로그램을 잘 살려나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실 황혼육아의 부담과 고통을 덜기 위해 보육복지를 강화하는 일은 ‘국가적 위기’로 까지 꼽히고 있는 우리사회의 저출산문제와 여성직장인의 경력 단절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해결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과 직결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보육정책이면서 노년 세대를 위한 일자리 정책이 될 수도 있으므로 세심한 설계와 적극적인 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지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10 워킹맘의 실태와 기업의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워킹맘의 이슈는 한두 가지의 정부 정책이나 기업의 제도로 해결할 수 없으며 기업, 정부,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들의 유기적인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피할 수 없는’ 황혼육아는 노후 삶의 질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며, 황혼육아를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사회 상황을 모른 척 하고 있기에는 스스로의 행복을 뒤로 미룬 노인들이 너무나 많다. 황혼육아도 살 맛 나는 노후를 위한 하나의 선택 사항이 되도록 사회적 배려와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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