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Vs Book] 세계2차대전사의 면면
[Book Vs Book] 세계2차대전사의 면면
  • 경준혁 기자
  • 승인 2013.11.25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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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이커=경준혁 기자]


전쟁의 기록, 종이는 인간보다 잘 참고 견딘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참상, 제2차 세계대전사


역사적으로 기록된 전쟁 중 가장 최근에 벌어진 전쟁, 2차 세계대전. 종전된 지 채 70년도 지나지 않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아직까지도 당시를 경험했던 이들이 생존에 그 참상을 전하고 있다. 전쟁의 직접적인 사망자만 무려 5,000만 명에 이르며 셀 수 없이 많은 부상자와 난민을 배출했고, 수 없이 많은 도시와 문화유산이 파괴된 인류사 최악의 사건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역사상 유래 없던 이 끔직한 전쟁을 다룬 수많은 저작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이전의 전쟁들과는 달리 방송, 신문, 사진 등의 매체가 발달되어 있던 시기였기에 그 파급력은 더욱 컸다. 당시 독일의 맹공을 받았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1953년에 출간한 ‘제2차 세계대전 -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일군 점령하의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던 유태인 소녀가 쓴 ‘안네의 일기’는 1947년 출간 이후 세계 50여 개국에서 번역되어 팔리며 전쟁의 참상을 많은 이들에게 알렸다.


저명한 전쟁사학자의 역작 -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전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전쟁사학자로 명성 높은 영국의 역사가 존 키건(John Desmond Patrick Keegan)은 ‘2차세계대전사’를 정리하며 “사건들의 모든 혼란과 비극으로부터 질서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것이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여기서의 사건이란 “세계의 일곱 대륙 가운데 여섯 대륙과 세계의 모든 대양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진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 사건”인 ‘제2차세계대전’을 일컫는다. 존 키건은 이 작품에서 ‘사건 설명, 전략 분석, 본보기 전투, 전쟁의 논제’라는 네 가지 주제를 이용, 이 전쟁을 파헤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패망이후 베르사유 조약 체제의 독일은 패전의 그림자, 엉망인 경제, 막대한 배상금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지치고 피폐해진 삶 속에서 독일 국민들은 무언가 돌파구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국민의 욕구와 불만을 뛰어난 연설을 통해 자극하며 점차 세력을 불려나간다. 베르사유 조약 파기, 경제재건, 군사 재무장 등 실질적인 경제정책과 정신적인 위안을 국민에게 제공하던 나치당은 결국에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얻고 독재정부를 건설한다. 존 키건은 이 시점에 가장 절묘한 점으로 공산화를 두려워한 기득권 세력이 ‘반공’을 위해 히틀러에게 마지못해 힘을 실어주는 부분을 꼽았다. 당시의 유럽은 1차 대전의 재건과정에서 활발한 산업화를 겪고 있었다. 독일은 우수한 인력과 노동력을 갖추고 산업화를 통해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 징병제를 통한 우수한 인적 자원의 충원이 가능해 진다. 이를 일사불란하게 추진한 히틀러는 당시 유럽 최고 전력의 군대를 양성해 낸다. 독일군은 새롭게 만들어진 기갑사단과 항공 전력을 이용한 ‘전격전(blitzkrieg)’을 통해 프랑스를 근 일주일 만에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낸다. 놀랄 정도로 신속한 기동력을 통해 유럽 거의 전역을 지배한 히틀러는 영국의 거센 저항과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점차 극단으로 치우친다. 인종차별주의자이자 극렬한 반사회주의자인 히틀러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을 전개함으로써 스스로 몰락을 자초한다.



인민의 승리, 인민에 의한 전쟁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히틀러와 친위대’, ‘아우슈비츠 수용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떠올린다. 하지만 수많은 전쟁사학자들은 독일의 패망을 앞당긴 결정적 장면으로 독일·소련 간의 전쟁을 꼽는다. 1941~1945년의 독·소 전쟁은 그동안 대부분의 내용이 이데올로기라는 장막에 가려져 그 진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었다. 탁월한 역사저술가로 손꼽히는 리처드 오버리(Richard Overy)는 영국과 러시아가 공동 제작한 10부작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1997년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원제:Russia's War)’을 저술한다.

당시의 독일·소련 간의 전쟁은 2차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격렬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이었다. 소련 측 주장으로 독소전 희생자만 최소 4,300만 명을 헤아리며, 서방측의 보수적 추산에서도 2,500만 명을 웃돈다. 가장 격렬한 전쟁이었던 독소전을 바라본 서구의 학자들은 주로 독일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광기에 찬 히틀러의 야욕, 러시아의 혹한의 날씨, 길고 긴 병참선의 유지, 무모한 스칼린그라드 공방전 등 독일의 패배 원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리처드 오버리는 개전초기 비참할 정도로 패퇴하던 소련이 어떻게 전세를 가다듬어 독일군을 밀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그는 책 말미에서 “소련은 거의 공통된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다. 구소련에서 전쟁 초반에 두드러진 터무니없는 무능과 의미 없는 억압에 퍼부어진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는 가장 혹독한 시험을 통과했다. 소련은 전쟁에서 당연히 패했어야만 하는데, 의기양양하고 포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을 ‘소련 인민’의 힘으로 돌리고 있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만 소련은 47만 명을 잃었고, 독일군의 진지선을 돌파하는데 다시 사망자 18만 명이 발생했다. 이 두 달간의 싸움에서 소련은 미국과 영국이 전쟁 전체 기간에 잃은 군인과 거의 같은 수치의 군인들을 잃었다. 전방에서 남자들이 죽어나갈 때 후방에서는 소련 전체 여성의 2/3에 해당되는 인원이 전쟁물자 생산에 동원되었다. 리처드 오버리는 이를 일컬어 “‘총력전’이라는 용어가 어떤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용어는 틀림없이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소련을 묘사하는 말일 것이다. 그토록 많은 국민을 전쟁 수행을 위한 작업으로 내몰거나, 그토록 과중하고 기나긴 희생을 요구한 국가는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광기의 시대와 역사 -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유럽에서 히틀러가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할 무렵, 태평양에도 전쟁의 암운이 드리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의 해군 비행기들이 미국 하와이 주의 오하우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군 기지에 기습 공격을 가한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 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당시 동남아 각국을 지배하던 일본은 미국의 견제를 받아 석유 수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진주만 공격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은 복수심에 불타 본격적인 전쟁 참가를 선언하고 대량의 군수물자와 병력을 투입해 일본의 패망을 이끈다.

잠자는 사자를 건드려 주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패배를 앞당긴 선택을 했던 도조 히데키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함께 A급 전범으로 손꼽힌다. 중일전쟁의 확전에 기여하기도 했던 그는 주축국 동맹에도 영향을 큰 영향을 미쳤다. 1941년 10월 일본 총리에 취임한 도조 히데키는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 총장 등을 겸임하며 사실상의 군사독재를 시작한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전쟁의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도조 히데키’를 바라본다. 그는 “제국주의가 낳은 비참한 결과의 죄과를 한 개인에게 전가해도 되는가. 전체가 낳은 과오의 합은 개인이 저지른 과오보다 가벼운가?”라고 질문한다. 아시아를 비참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몇몇 개인만의 문제였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 와중에 ‘반영되었을 전체의 의지’에 대한 반성 없이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몇몇 전범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포화 한 복판에서의 기록 -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폭풍속의 씨앗’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폭풍 한가운데 던져진 수많은 개인들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죽어갔다. 전략을 내다보는 지도위가 아닌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2차세계대전을 겪은 인물의 기억, ‘폭풍 속의 씨앗’. 1938년 15살의 나이로 독일 ‘SS 토텐코프 부대’의 무장친위대가 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전쟁을 경험한 8년의 시간동안 치열하게 싸우고 살아남는다. 그는 어쩌면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을 본인의 기억을 자세히 써내려간다. 군가전문가와 역사학자들이 쓴 기존의 전쟁사와는 달리 ‘폭풍 속의 씨앗’은 전장의 현실 자체에 집중한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기존에 나온 대부분의 회고록이 고위 지휘관급 인물들의 기록으로 최전선이 경험이 부족했던 반면, 이 작품은 영하 50도를 치닫는 데미얀스크의 혹독한 포위전, 쌍방 300만의 대병력이 격돌한 쿠르스크 전투의 장대한 개막과 처절한 전차전, 절망 속에서 이어지는 독일 본토 방위전이 일인칭 시점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또한, 전쟁사 측면에서는 풍부한 당시 사진 자료와 함께 토텐코프 사단 일선 부대의 편제, 주요 전투, 해당 전선 상황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이 흥미 위주의 이야깃거리를 나열한 무용담을 넘어선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저자는 ‘스스로의 진실에 충실한다’는 원칙에 따라 자기가 목격한 친위대의 범죄와 부정적 측면들을 솔직히 밝힌다. 이는 맞서 싸웠던 소련군의 그에 못지않은 행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그렇게 차례차례 죽어가는 전우를 보며, 서로의 증오를 부추길 뿐인 계속된 공방전을 겪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살아남은 한 병사의 잊지 못할 고백이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은 치열하게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막중한 의무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진실을 아는 누군가가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후세에 남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책은 장대한 자료를 엮어낸 다큐멘터리나 유명인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엮인 공적인 전쟁사로는 담아낼 수 없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역사이다.

정리 / 경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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