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재벌들, 한국은 기업의 무덤인가
무너지는 재벌들, 한국은 기업의 무덤인가
  • 조재휘 기자
  • 승인 2013.11.05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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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대마불사’의 신화는 없다, 성장 위해서는 오직 벤처뿐
[이슈메이커=조재휘 기자]

[Conglomerate] 2013 대한민국 재벌잔혹사

무너지는 재벌들, 한국은 기업의 무덤인가

 

올해 4월 기준 재계 순위 38위인 동양그룹은 한때 국내 5대 그룹 안에 들던 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룹이다. 그런 동양그룹이 한 순간에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샐러리맨 신화’로 불리던 강덕수 회장의 STX그룹 또한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지난 9월 분해되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웅진그룹 또한 7개월 째 법정관리를 벗어나기 위해 뼈아픈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재계 분위기는 흉흉하다. "다음 순번은 ○○그룹 또는 △△그룹"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돈다.

 

어디하나 안전하지 않다. 촉각 곤두세운 재계
지난 10월, 증권사의 리포트 하나에 국내 재계가 술렁였다. 14일 LIG투자증권이 낸 ‘그룹 리스크진단 : 위험하지만 참을 만하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때문이었다.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돌아다녔지만, 이 보고서에는 유선웅 연구원은 부채비율이 높은 5개 대기업의 위험을 분석했고, “동부, 현대, 한진, 두산, 이랜드 순으로 위험하다”고 요약했다. 동부그룹에 대해서는 “시장성 차입금 비중이 높아 동양을 닮아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동양그룹 사태로 민감한 시기에 해당 기업으로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동양그룹은 “보고서 내용 어디에서도 동부가 가장 위험하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인지, 동부의 차입구조가 왜 동양과 유사한지 합리적인 설명이 없다”며 “막연히 동양과 비슷하다고 단정한 것은 증권사 분석 보고서의 기본에서 크게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신용도와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수정 보고서를 내는 해프닝으로 종결됐지만 재계 순위 24위의 대기업이 증권사의 보고서 하나에 날을 세운 점은 지금 대기업들이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매일경제신문 산업부의 노원명 기자는 기사를 통해 “재계에 온통 적색, 황색 경고등이 점멸하고 있다. 재계 순위 30위권 기업 중 절반 이상이 오너십 실종, 유동성 위기, 업황 부진 등적어도 한 개 이상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나타난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등 한국을 먹여 살려온 주력 업종 중 확신을 갖고 경쟁력을 말할 수 있는 분야는 전자뿐, 보다 엄밀히 말하면 삼성전자뿐이다”라며 우리나라 대기업 중 어느 한 곳도 안전하지 못함을 우회해서 표현했다. 
 


수많은 재벌이 명멸해간 한국, 요원한 ‘100년 기업’
  재벌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1970년대부터 수많은 기업이 부침을 거듭했다. 우리나라가 IMF 체제에 들어섰던 1997년 이후 2013년까지의 재계순위 변화를 보면(공기업 제외) 한국 대기업들의 흥망성쇠와 이합집산이 확연히 느껴진다. 20위 내의 순위만 보더라도 1997년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그룹’의 이름을 2010년 이후로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현대그룹의 창업주 故 정주영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 경영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 회장의 둘째 아들 정몽구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다섯 번째 아들인 故 정몽헌 전 현대 아산 회장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다툰 이른바 ‘왕자의 난’에 의한 그룹의 분열 때문으로, 현재의 재계순위에서는 ‘현대그룹’ 대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 신세계와 같은 ‘범현대가’ 계열 기업의 이름들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1997년 당시 재계 4위에 군림하던 대우그룹이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해체수순을 밟아 2001년 재계 순위 7위를 마지막으로 그 자취를 감췄다. 이 밖에도 쌍용그룹, 진로그룹, 동아그룹 등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사라져 갔다.
  재미있는 점은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재계 순위에서 보이지 않다가 새롭게 순위에 이름을 올린 기업은 STX 그룹뿐이라는 점이다. 다른 기업은 기존 공기업에서 민영화 되었거나(포스코, KT), 계열분리가 된 경우(현대차, 현대중공업, GS, LS), 그리고 사명을 바꾼 경우(선경-SK, 금호-금호아시아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STX 그룹도 결국 무너졌다.
  사실 기업의 흥망성쇠는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당연히 재벌도 부침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명멸해 가는 주기는 해외 선진국들에 비해 너무 빠르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한국전쟁을 거쳐 어느 정도 사회가 정비된 1965년을 시작으로 최근까지의 통계 기록을 보면, 1965년의 100대 기업 중 2009년까지 살아남은 기업이 12개밖에 안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중소기업보다 생존율이 높은 대기업이 이 정도이니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에도 독일의 벤츠나 미국의 P&G 같은 ‘100년 지속 기업’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몸집을 불려야 살아남는다? 재벌의 딜레마
  많은 전문가들은 재벌의 주된 몰락 요인으로 몸집 불리기와 과도한 사업 다각화를 꼽고 있다. 기업의 핵심 역량과는 무관한 영역에 뛰어들어 기업 인수·합병 등을 통해 무리하게 사업 영역을 확대하다가 자본 잠식 등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공병호경영연구소의 소장인 공병호 박사는 2011년 펴낸 저서, <대한민국 기업흥망사-실패의 역사에서 배우는 100년 기업의 조건>에서 역사에서 사라져간 재벌들의 실패 원인을 일곱 가지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재벌의 몰락 원인으로 무리한 사업다각화, 조직관리의 패착, 사업구조 쇄신의 실패, 시장을 읽어내는 통찰력 부재, 오너의 자질과 경영 능력 부족, 급격한 환경 변화 속 준비되지 않은 불운, 정치권력과의 불협화음을 꼽았다. 공병호 박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 기업이 몰락한 원인은 제각각이계지만 크고 넓게 살펴보면 과욕과 과신, 과속 등이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업가들은 천성적으로 미래를 낙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과욕을 부르고 결국 파멸로 인도했죠. 몰락한 재벌은 또 과거의 성공해 취해 자신을 과신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곤 한 번의 실수로 망할 수도 있다는 기초적인 상식조차 망각했습니다. 이어 2,3세대로 대를 이으면서 과속을 했어요. 창업주보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겁니다”
  재벌의 몰락 원인을 재벌 내부보다 외부에서 찾는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이한구 수원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기업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요즘 시작 단계에 있는 기업들에게 1980년대 이전보다 주변 환경이 가혹해졌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정부가 대기업 육성책을 통한 경제 성장을 추구했기에 상대적으로 기업하기가 좋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대기업 규제가 강해지면서 똑같은 잣대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기업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지주회사 분석 전문가인 이훈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저성장 기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높으면 기업이 성장할 기회가 많고, 때문에 GDP 성장률이 7%가 넘던 1990년대 이전에는 수많은 신흥 재벌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성장이 정체된 한국에서 기본적으로 사업 기회가 줄어든 탓에 그룹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인수·합병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5대 재벌가, 한국 기업 생태계를 독점하다
웅진과 STX는 1990년대 이후 인수·합병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문제는 과도한 경영권 프리미엄 지급으로 본진이 휘청거리게 됐다는 점이다. 이훈 연구위원은 “웅진은 극동건설 인수로 망가지기 시작하다가 태양광 투자에서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STX는 인수한 기업을 지렛대 삼아 더 큰 기업을 인수하는 전략(레버리지)을 폈는데 경기 사이클을 심하게 타는 업종 특성의 덫에 걸렸다”고 분석했다. 산업조직론 전문가인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또한 “1980년대 이전에는 수익성 좋은 계열사가 자금줄 노릇을 하는 재벌의 선단식 경영 구조가 통했다. 이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기존 재벌은 삼성이나 현대차처럼 글로벌 플레이어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뒤지거나 수익성에 문제가 있는 하위 재벌이나 신규 대기업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웅진과 STX처럼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흥 대기업의 퇴장은 한국에서 창업 당대에 재벌(대기업) 반열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물론 재벌도 부침이 있다. 재벌이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1970년대부터 수많은 기업이 부침을 거듭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재벌의 문은 완전히 닫히고 상위 5대 재벌과 2, 3세 상속을 거치면서 분화한 5대 재벌의 방계 기업들이 한국 대기업군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지난 4월 ‘한국 스타일을 넘어서: 신성장 공식’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이 보고서에서 맥킨지는 대기업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이 중소기업과 서비스 산업으로 파급되지 못했고, 이는 결국 중산층의 가계 소득 감소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5~2010년 국내 제조 부문 대기업 생산성은 9.3% 증가했다. 제조업 부문 대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2005년 6.7%에서 2010년 16.7%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국내 대기업이 국내 고용 창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에서 12%로 뚝 떨어졌다. 국내외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한 대기업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는 반면, 국내 기업 생태계에서 먹이를 나누는 역할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는 뜻이다.

재벌만능시대의 종언, 성장 위해선 다시 벤처정신으로 무장해야
보고서에 따르면 300만개의 한국 기업 중 중소기업 비중이 99.9%에 달한다. 그러나 이 중 96%가 종업원 50명 미만의 영세 업체다. 이들이 국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8%에 달한다. 즉 고임금·양질의 대기업 일자리는 제한적이고, 저임금에 고용 불안정의 동의어처럼 쓰이는 영세기업의 일자리만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글로벌화에 성공한 대기업의 성장이 국내 내수 경제 부흥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이훈 연구위원은 “저성장 시대에 성장하는 기업을 만들려면 결국 벤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여럿 생겨나야 한다는 얘기다. 기존에 없던 인터넷 업종에서 기회를 만들어낸 네이버의 이해진 의장이나 넥슨의 김정주 회장이 바로 그런 기회를 잡은 사람들이다. 덧붙여 그는 “내수 기업도 성장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전했다. 유통이나 식음료업체들이 중국·러시아·동남아 진출을 타진하는 것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 그래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일정 부분 성공한 오리온은 식음료업계의 황제주로 군림하고 있고, 롯데제과가 동남아 진출을 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상승 교수는 “방법이 정당하다면 대기업의 경제 비중이 커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산업화 시대에 정부가 감독 노릇을 했다면 지금은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시장 지배력을 남용해 후발 기업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지 여부를 공정거래법으로 잘 감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닫힌 생태계는 경쟁력을 잃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가 신규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내놓은 ‘창조경제 해법’이 실질적으로 젊은이들의 벤처 도전을 도와주고 시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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