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선수 서포터스, 세계 축구계의 서포터스 문화
12번째 선수 서포터스, 세계 축구계의 서포터스 문화
  • 박병준 기자
  • 승인 2013.05.28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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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포터스 문화의 발전방향은?
[이슈메이커=박병준 기자]

[Football Supporter] 서포터스 문화






2002년 대한민국을 붉게 물들였던 ‘붉은악마’의 응원소리를 기억하는가. ‘Be the Reds’라 쓰여진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광화문 앞으로 몰려나온 수만의 축구팬들을 보며 전 세계가 감탄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서포터스인 ‘붉은악마’를 비롯해서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인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독일의 분데스리가 등 각국의 축구세계에서는 각 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스가 있다. 축구를 논하기에 있어 서포터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문화이다. 축구가 주목을 받을수록 이 서포터스 문화 역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축구의 서포터스 문화, 그리고 붉은악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서포터스를 떠올리자면 대부분의 사람이 ‘붉은악마’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1995년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Great Hankuk Supporters Club)’라는 명칭으로 98`프랑스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국가대표팀 서포터스는 1997년 ‘붉은악마’라는 명칭을 확정지으며 조직적 응원을 시작했다. 붉은악마라는 명칭의 유래는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대한민국 청소년 팀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세계 4강에 오르며 시작됐다. 당시 우리 선수들은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고 외신들은 체구가 작은 한국 선수들이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모습을 빗대 ‘붉은악령(Red Furies)’ 등으로 부르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후 국내에서 ‘붉은악마(Red Devils)’라는 표현으로 바뀌며 지금에 이르게 됐다.

  한국 축구의 서포터스 문화는 그리 긴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다. 1993년 PC통신인 하이텔에 축구 동호회가 결성될 무렵까지 한국 축구는 변변한 서포터스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국가대표 경기인 A매치 외에 프로축구에 대한 인기는 낮은 편이었다. 1994년에 열린 미국월드컵은 축구동호회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3년 12월 포항구단의 팬클럽을 시작으로 프로축구단들에게 팬클럽이 생기기 시작하며 서포터스 문화가 시작됐고 월드컵의 열기와 함께 한국프로축구 또한 새로운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박수는 사실 수원의 서포터인 ‘그랑블루’가 수원을 응원할 때 사용했던 구호와 박수에서 유래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많은 팬들은 알고 있다. 한국 프로축구 서포터 문화가 만들어낸 긍정적 결과물로 평가될 만하다. 2003년 당시 수원삼성블루윙즈의 김호 감독은 원정 경기때 "우리 애들(서포터스)이 항상 더 많아"라며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각 구단마다 고유 명칭을 지닌 서포터스가 있다. FC서울의 수호신, 수원의 그랑블루, 성남의 천마불사, 대전의 퍼플크루 등 각 팀의 서포터스는 경기장 내외에서 응원하는 팀을 위해 선수들과 함께 뛰고 있다. 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서포터스는 유니폼을 차려입고 각종 응원도구와 함께 경기장을 찾는다. 각 팀의 응원가를 부르며 90분 내내 서서 목소리를 높이며 선수들을 응원한다. 서포터스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선수들은 더 열심히 뛰고 좋은 결과를 얻곤 한다. 경기가 있는 날 상암월드컵경기장이나 수원월드컵경기장, 전주월드컵경기장을 찾는다면 검빨(검정빨강)의 물결, 푸른 물결, 녹색 물결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서포터스가 특히 많은 ‘빅클럽’이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은 FC서울의 홈구장으로 ‘상암벌’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수원월드컵경기장은 ‘빅버드’,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전주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각 팀의 특성을 경기장과 융화시킨 별칭으로 서포터스 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1부 리그인 K리그클래식의 팀들에게만 서포터스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위리그의 경우 서포터스들의 수는 적으나 결집력은 더 큰 경우도 있다. 3부 리그인 내셔널리그의 부산교통공사는 다국적 서포터스를 보유하고 있다. 관중은 3자리 수에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가 더 많지만 한국, 미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출신 등으로 구성된 서포터스는 응원의 목소리를 높인다. 같은 내셔널리그의 목포시청의 서포터스 ‘플라비’는 응원할 수 있는 팀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며 경기가 있는 날만 손꼽는다고 한다. 비록 텅 빈 경기장에 홀로 응원하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팀을 응원하는 마음은 만 명이 넘는 관중이 응원하는 빅클럽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세계 각국의 서포터스 문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가장 유명했던 하나는 ‘부부젤라’였다. TV를 중계를 보는 많은 축구팬들까지 경기 내내 부부젤라의 벌떼 소리를 들어야했다. 남아공에서는 부부젤라의 요란한 소음이 악마의 하수인으로 알려진 바분(개코원숭이)를 죽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에 부부젤라를 부는 것은 상대팀을 제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남아공월드컵의 아이콘으로까지 부상했던 부부젤라는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그 엄청난 소음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가장 큰 성황을 누리고 있는 유럽축구의 서포터스는 인기만큼이나 큰 열정을 보여준다. 경기시작 전, 선수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장내아나운서에 맞춰 수만 명의 팬들이 외치는 함성은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자리에 있다면 엄청난 전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특히 독일의 분데스리가는 전 경기 평균 관중수가 4만5천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대부분의 경기장 근방은 차량통행이 통제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축제분위기 속에 속속 경기장으로 모여든다. 분데스리가의 팀 중 하나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평균 관중수가 80,451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축구팬들은 도르트문트 서포터스들이 흔드는 수많은 깃발과 머플러가 웬만한 타경기장 관중수보다 많다고 말한다. 수만 명의 관중이 만들어내는 카드섹션, 경기장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노란 종이들은 그 엄청난 양에 비례하는 그들의 열정을 보여준다.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2-13시즌 우승을 이룬 맨체스터유나이티드는 MUST라는 서포터스를 갖고 있다. MUST는 전 세계 87개국 32,00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영국 내 최대의 서포터스 그룹이다. 그들은 응원뿐 아니라 운영 등 구단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관여하고 있다. 2005년 미국의 말콤 글레이저가 은행과 헤지펀드에서 7억9,000만 파운드를 대출하는 강행부실인수를 진행할 때 MUST는 글레이저 가문의 맨유 인수를 반대하며 거리 시위, 구단 스폰서 기업 제품 불매 운동, 맨유 서포터스 기금 마련 등의 행동을 해왔다. 그들은 팬들이 오랫동안 구단의 발전을 위해 많은 지출을 해왔지만 글레이저 가문이 인수과정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 팬들에게 더 많은 비용 지출을 강요하고 있다며 구단주 측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MUST는 “축구 그리고 맨유는 우리에게 종교같은 존재다”라며 자신들의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는 이유를 밝혔다.

  유럽축구와 한국축구의 서포터스 문화에서 가장 큰 차이는 역사에 대한 비중이다. 3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의 프로축구도 물론 라이벌 팀과의 역사가 경기에 묻어나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유럽의 축구는 역사와 문화가 함께한다. 1958년 2월 6일, 독일의 뮌헨에서 활주로의 녹은 눈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에 실패한 사건이 있다. 당시 비행기에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선수들과 서포터, 기자들이 타고 있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44명 가운데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를 ‘뮌헨참사’라고 부른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전 세계 축구팬들은 비탄에 빠졌고 영화화가 진행되며 사고로 사망한 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매년 2월6일이 있는 주의 경기는 경기장의 모든 이들이 묵념의 시간을 갖고 선수들은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선다.


과격하게 축구를 사랑하는 서포터스, 훌리건

1960년대 초, 영국은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고 실업자와 빈민층은 그 울분을 축구 경기장에서 폭발시키는 일이 잦았다.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훌리건’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현재에도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과 과격한 팬들을 훌리건이라 지칭한다. 훌리건들의 대표적인 사건은 1964년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리마 경기 300여 명 사망,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전쟁 등이 있다. 특히 1985년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에서 발생한 ‘헤이젤 참사’는 유벤투스와 리버풀의 서포터스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인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지난 2012년 3월 인천 유나이티드와 대전 시티즌의 경기에선 대전 서포터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해 인천 마스코트를 상대로 분풀이를 하는 등 난동을 부렸고, 이 장면은 안방에 생중계됐다. 게다가 보도되지 않았지만 흥분한 양 팀 서포터들은 경기장 밖에서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원래 서포터 문화가 발달한 유럽 축구에서도 상대를 비난하거나 비하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악명 높은 훌리건도 바로 서포터에서 나온 것이다. 사건은 당사자의 반성과 ‘무관중경기’라는 중징계로 일단락 됐다. 유럽의 선진축구를 지향하는 것은 좋지만 좋지 않은 모습까지 지향할 필요가 있을까?

  2011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전북과 오사카의 경기에서는 전북의 일부 서포터스들이 ‘일본 대지진을 축하한다’라는 응원 걸개를 경기장에 설치한 사건 또한 발생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중동으로 원정 경기를 떠났을 때 TV를 통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은 중동 선수들의 침대축구도 있지만 팬들의 몰지각한 행동들이다. 레이저포인트를 선수들의 얼굴을 향해 쏘고 플레어를 터뜨리고 물병 등 쓰레기를 투척한다.

  한국의 축구는 아직 발전 중이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본선을 7회 연속 진출했고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다. 박지성이라는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했고 손흥민, 기성용 등의 전
도유망한 젊은 선수들 또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차범근의 현역시절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축구는 계속 발전 중인데 곁에서 응원하고 좋아해주

는 팬들, 서포터스들이 발전을 역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2002년 외신들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악마와 한국 축구팬들에게 놀란 것은 많은 인원이 거리에 나와 응원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독일전의 경우 650만의 인원이 길거리 응원을 나왔지만 그들이 지나간 곳에 쓰레기는 없었다. 그 많은 인원이 길거리에 나왔지만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는 응원의식에 세계가 놀란 것이다. 경기장을 찾는 팬들과 서포터스들이 선진의식을 갖고 경기장을 아끼고 선수들을 응원하며 축구를 사랑해준다면 한국 축구는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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